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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정호의 시시각각

‘소주 체질’ 한국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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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박정호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소줏값 인상 여부를 놓고 논란이 뜨겁다. 서울의 한 마트에 진열된 여러 종류의 소주. [연합뉴스]

소줏값 인상 여부를 놓고 논란이 뜨겁다. 서울의 한 마트에 진열된 여러 종류의 소주. [연합뉴스]

밥상에 놓인 소주병에 시선이 멈췄다. 병목 라벨에 찍힌 숫자 30이 선명하다. 알코올 도수 30도를 뜻한다. 1970년 산화한 노동운동가 전태일을 다룬 애니메이션 ‘태일이’(2021)의 한 장면이다. 미싱사였던 태일이 아버지의 상차림 풍경이다. 그는 김치와 풋고추를 안주 삼은 소주 한잔에 하루의 시름을 달랬다.

“소주 값 인상 자제해야” 관치 논란
소설가 이청준이 말한 별난 ‘주법’
“소주 먹되 남들에겐 비싼 술 줘야”

 노동자 출신의 시인 박노해는 ‘노동의 새벽’에서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가운 소주를 붓는다’고 했다. 그가 부은 소주는 몇 도일까. 1984년 첫 시집이 나왔으니 25도였을 것이다. 73년 업계 1위였던 진로는 30도 소주를 중단하고 25도 제품만 내놓기 시작했다. 당시 주정 원료 수입이 억제되자 알코올 함량을 낮췄다.
 ‘소주=25도’ 공식은 20년 정도 유지됐다. 91년 희석식 소주 도주 제한이 완화되면서 23도, 21도, 20도 소주가 잇따라 나왔다. 요즘 흔히 마시는 소주는 16도 후반대다. 이달 초 충남 지역 소주업체는 14.9도 제품까지 출시했다. “캬~~” 탄성과 함께 즐기는 ‘소주=독주’는 이제 옛말인 듯싶다. 세상이 그만큼 순하게 바뀐 걸까. 글쎄올시다. 지난해 합계 출산율이 0.78명으로 추락할 만큼 시대는 악다구니로 달려가고 있지 않은가.

 요즘 소주가 입방아에 오르내린다. 업체들이 원가 상승을 이유로 값을 올리려 하자 정부가 실태조사 카드를 꺼내들었다. 음식점 소주 값 6000원 우려가 커지자 당국이 즉각 반응했다. 관치 논란에도 업체들은 일단 꼬리를 내렸다. 하지만 언젠가 다시 터질 휴화산 상태다. 정부가 억누른다고 물가가 “예”하며 잠잠해지진 않을 터다.

 왜 소주는 늘 시끄러울까. ‘소주=서민’ 등식 때문이다. 소주는 한국의 분단·산업화·민주화 궤적과 함께해 왔다. 소주가 ‘한국인의 술’로 자리매김을 시작한 것은 6·25 이후다. 북한 피란민이 내려오면서 소주 문화도 함께 월남했다. 1935년 『조선주조사』에 따르면 남한 지역은 막걸리 소비 비중이 80%대였던 반면, 북한 지역은 반대로 소주가 90%에 이르렀다. 물론 그때는 희석식이 아닌 증류주 시대였다.

2021년 말 개봉한 애니메이션 '태일이'에 묘사된 전태일 아버지의 밥상 모습. [화면 캡처]

2021년 말 개봉한 애니메이션 '태일이'에 묘사된 전태일 아버지의 밥상 모습. [화면 캡처]

 소주 대중화에 가속페달이 붙은 것은 1960년대부터다. 박정희 정부가 64년 12월 증류주 생산을 전면 금지하면서다. 쌀 부족에 따른 식량난 타개가 가장 큰 이유였지만 전국 각지의 증류주 공장이 속속 문을 닫게 됐고, 대기업 독과점 중심의 희석주 세상이 열렸다. 이후 값싼 희석주는 60~70년대 저임금에 기반한 산업화 사회를 떠받쳤다. 메타버스·인공지능으로 달려가는 요즘이라지만 2021년 성인 1인당 평균 53병을 마셨다 하니 한국인의 소주 체질은 당분간 변하지 않을 것 같다. 권력자들이 소주 값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서편제’ 작가 이청준의 단편 ‘소주 체질’(1988)에 꽤 독특한 인물이 나온다. “나는 소주면 그만”이라며 늘 소주만 즐기지만 남들에게는 비싼 양주를 선물하는 갈곡(葛谷)이다.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좋은 술을 보내서 혼자 마시게 해줘 봐. 제놈이 사람이라면 남이 준 술을 마시면서 심사가 사나워질 까닭이 있겠어? 부질없는 주사보다 그 술하고 조용히 속 이야기나 나누게 되기 십상이지. 제물에 고맙고 즐거워지는 거구.”

 갈곡의 주법은 명징하다. 원망과 보복, 음모와 책략이 아닌 감사와 겸손, 대화와 여유의 소주를 얘기한다. 정치·통치의 지향점과 다를 바가 없다. 틈만 나면 반대 진영에, 또 유권자에게 “소주 한잔해야 하는데”를 입버릇처럼 내뱉는 정치인과 품격이 다르다.
 일례로 문재인 전 대통령은 퇴근길 남대문시장에서 시민들과 소주 한잔하겠다는 공약을 지키지 못했고, 호주가로 소문난 윤석열 대통령이 야당 인사들을 초대해 소주상을 차렸다는 소식도 들은 적이 없다. 소주 값 자제 요청도 중요하지만 사람들이 즐겁게 소주 잔을 기울일 수 있는 여건을 먼저 만들어야 한다는 것은 술자리의 객설일 뿐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