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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상언 논설위원이 간다

75년 만에 찾은 아버지 유골 … “이젠 4·3 싸움 끝낼 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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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이상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이상언 논설위원

이상언 논설위원

지난 3·1절 아침 제주에 보슬비가 내렸다. 철조망 너머로 활주로가 보이는 제주국제공항 외곽에 강술생씨(77)와 함께 섰다. 1946년 개띠 해에 태어나 ‘술생’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그는 비를 맞으며 담장 안을 바라봤다. 전날 술생씨는 제주 4·3평화공원 봉안관에 부친 강창근씨 유해를 안치했다. 생사가 확인되지 않던 아버지는 공항 아래에 내내 묻혀 있었다. 두 살 때 집을 나간 부친이 75년 만에 그렇게 돌아왔다.

강술생씨가 지난 1일 제주공항 북동쪽 땅을 바라보는 모습. 바로 앞 부지가 정뜨락 비행장이 있던 곳이고, 그곳에서 1948년에 실종된 강씨 부친의 시신이 발굴됐다. 이상언 기자

강술생씨가 지난 1일 제주공항 북동쪽 땅을 바라보는 모습. 바로 앞 부지가 정뜨락 비행장이 있던 곳이고, 그곳에서 1948년에 실종된 강씨 부친의 시신이 발굴됐다. 이상언 기자

강창근씨는 1948년 여름 어느 날 집수리에 쓸 재료를 구하러 제주 월평리 집에서 읍내로 향했다. 그의 나이 스물한 살 때였다. 해가 져도 집에 오지 않았다. 한참 뒤에 제주항 근처 주정 공장에 감금돼 있다는 것이 확인됐다. 이른바 ‘좌익 활동’과는 거리가 먼, 밭에서 농사짓고 틈틈이 목공 일하던 사람이라 가족들은 곧 풀려날 것으로 믿었다. 그런데 몇 달 뒤 아예 소식이 끊겼다.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스무 살에 생과부가 된 어머니로부터 술생씨가 자라면서 들은 4·3의 비극이다.

"수백 번 다닌 공항에 아버지가…"

술생씨는 부친이 어디엔가에 살아 있을 수도 있다는 기대를 했다. 주정 공장 수용소에서 탈출해 육지로 건너갔거나 일본으로 밀항해 숨어지내다가 가족에서 연락하기 어려운 사정이 생겼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게 10여 년 전 세상을 뜬 모친의 평생 희망이기도 했다.

지난해 봄 술생씨는 피를 뽑았다. 4·3 관련 행방불명인 가족에게서 채혈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4·3평화재단에 연락했다. “정뜨락 비행장(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군용 공항. 그 부지가 제주공항에 편입)에서 나온 유골의 연고자를 찾는 유전자 검사를 한다는 뉴스를 봤다. 혹시 몰라서 해 보긴 했는데 아버지가 거기에 묻혀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술생씨 말이다.

지난달 14일 술생씨는 아버지 유해가 확인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정뜨락 비행장 터에서 발굴된 유해 중에 술생씨와 유전자가 일치하는 것이 있다고 했다. 그는 “유골이라도 찾을 수 있게 돼 다행이라는 생각, 더 일찍 찾아 나섰다면 진작 찾을 수도 있었다는 후회로 지난 2주 동안 마음이 복잡했다”고 말했다.

지난달 28일 강술생씨(가운데)가 다른 두 유족과 함께 4·3으로 희생된 부친의 유해를 인도받았다. 제주4·3평화재단

지난달 28일 강술생씨(가운데)가 다른 두 유족과 함께 4·3으로 희생된 부친의 유해를 인도받았다. 제주4·3평화재단

술생씨 부친의 유골은 15년 전인 2008년에 수습됐다. 4·3평화재단은 2007∼2009년과 2018년에 정뜨락 비행장 부지에서 유해 발굴을 했다. 4·3과 관련해 경찰서와 주정 공장에 감금돼 있던 사람들이 비행장 터에서 총격과 매장으로 학살됐다는 증언에 따라 한 작업이었다. 지금까지 유해 387구가 그곳에서 나왔다. 그중 약 139구는 가족 유전자 대조를 통해 신원이 확인됐다. 나머지는 당시 일가족이 모두 숨져 채혈을 할 가족이 남아 있지 않거나, 유족이 살아있지만 아직 채혈하지 않아 확인되지 않는 것으로 추정된다.

강창근씨 유골이 나온 제주공항 내의 정뜨락 비행장 터는 술생씨의 현 거주지에서 직선으로 약 3.5㎞ 거리에 있다. 술생씨는 “평생을 공항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살았고, 육지에 가느라 평생 수백 번 공항에 갔다. 아버지가 그 아래에 있는 것도 모르고…”라고 울먹이며 말했다.

제주4·3평화공원에 마련된 강씨 부친 강창근씨 표석. 이상언 기자

제주4·3평화공원에 마련된 강씨 부친 강창근씨 표석. 이상언 기자

제주공항 아래에 묻힌 사람들

술생씨는 두 가지 바람이 있다. 하나는 자신처럼 다른 사람도 부모의 유해라도 찾는 것이다. 그는 “이제 추석과 설에 자식들과 갈 곳이 생겼다”고 말했다. 4·3평화재단은 관계자 증언 등을 근거로 정뜨락 비행장 터 외에도 조천읍·남원읍·도두동 등에서 발굴 작업을 벌여왔다. 제주공항 활주로 아래에 다수의 시신이 매장돼 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그곳은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 김창범 4·3희생자유족회장은 “활주로의 일부를 들어내고 그 아래를 확인할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 제주도에 새 공항이 생기고 지금의 공항을 정비하는 일이 진행된다면 유해 찾기 작업이 꼭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4·3 희생자 유해 찾기는 제주 밖의 육지에서도 진행되고 있다. 1948년부터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전까지 4·3 관련으로 수천 명의 제주도민이 육지 교도소로 보내졌다(제주도에는 수형 시설이 없었다). 그중 살아 돌아온 사람은 많지 않다. 전쟁 초기에 북한군의 점령이 임박했을 때 전국 교도소에서 4·3 관련자 2000명 이상이 처형된 것으로 추정된다.

양성홍 4·3행방불명인유족협회장은 “육지 형무소에 갔다가 다시 오지 못한 사람이 2530명이다. 대전 형무소에만 300명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내 아버지도 그곳에 있었다. 재소자들이 6·25 발발 직후에 무더기로 총살됐다는 미군 기록이 있고, 대전 형무소 인근 골령골이라는 곳에서 1400여 구의 시신이 나왔다. 4·3평화재단이 발굴된 유골과 제주 유족의 유전자를 대조하는 작업을 시작했다고 하는데, 좀 더 빨리 진행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보수·진보 갈등 이제 사라지길…  

술생씨의 두 가지 희망 중 다른 하나는 “4·3을 놓고 벌이는 싸움 끝내기”다. 술생씨의 친조부, 외조부도 4·3으로 목숨을 잃었다. 유족회 간부를 비롯해 제주에서 만난 4·3 관계자들은 정치권의 움직임을 주목하고 있었다. “4·3사건이 북한의 김일성 지시에 의해 촉발됐다”는 국민의힘 태영호 의원의 지난달 발언에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제주시 거리에 ‘태영호를 제명하라’고 쓰인 플래카드가 펄럭였다. 정순신 변호사 아들의 학교폭력 사건에서 제주도 출신 피해 학생이 “제주서 온 빨갱이”라는 놀림을 당했다는 보도가 민심을 더 자극했다.

제주항 인근의 옛 주정 공장 터에 건립되고 있는 4·3역사관 마당에 세워진 조형물. 바다로 끌려가 수장된 희생자들을 형상화했다. 이 역사관은 이달 13일에 개관한다. 이상언 기자

제주항 인근의 옛 주정 공장 터에 건립되고 있는 4·3역사관 마당에 세워진 조형물. 바다로 끌려가 수장된 희생자들을 형상화했다. 이 역사관은 이달 13일에 개관한다. 이상언 기자

유족회는 윤석열 대통령의 4·3 추념식 참석을 바라고 있다. 김창범 유족회장은 “윤석열 대통령에게 추념식에 꼭 참석해 달라는 내용의 서한을 보냈다. 노무현·문재인 대통령과 달리 이명박·박근혜 대통령은 한 번도 참석하지 않았다. 윤 대통령은 지난해 당선인 신분으로 추념식에 참석해 제주도민의 환영을 받았다. 윤 대통령이 4·3을 둘러싼 보수·진보 갈등에 종지부를 찍고 치유와 화해의 길을 확고히 하는 지도자가 됐으면 좋겠다는 게 유족들의 뜻”이라고 설명했다.

윤 대통령의 대선 공약에는 ‘제주 4·3 완전 해결’이 들어있다. 정부 관계자는 2일 “대통령의 4·3 추념식 참석 여부는 아직 결정되지 않은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4·3 김일성 지시설은 이미 정부·국회서도 폐기"

태영호 의원의 4·3 관련 발언 문제에 대해 양정심 제주4·3평화재단 조사연구실장에게 물었다. 양 실장은 약 30년간 4·3 연구를 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태 의원은 “제주4·3사건 김일성 지시설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진실”이고 “명백히 김일성의 지시에 의해 촉발됐다”고 주장한다.  
“학계에선 30여 년 전에 폐기된 주장이다. 1980년대 이후 본격화된 4·3 진상규명 과정에서도 논증되었고, 2003년에 발표된 정부의 ‘4·3사건진상조사보고서’도 남로당 중앙 조직 또는 북한 정권 지령설에 근거가 없다고 적시했다. 1999년에 ‘4·3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한 후 공식적으로 폐기된 왜곡된 주장을 국회의원이 언급하는 것은 유족과 국회를 모독하는 행위다.”  
남로당 제주도당이 봉기를 계획하고 부추긴 것은 사실이며, 따라서 남로당 중앙 조직 또는 김일성 세력과 제주도당이 연계돼 있었던 것 아니냐는 의심이 가능한데.
“남로당 제주도당이 봉기를 일으킨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남로당 중앙위, 북한 정권과의 연계는 없었다. 1948년 4월 당시 북한 정권과 남로당 중앙 조직은 김구 선생과 김규식 선생이 참여한 남북 협상에 집중하고 있었다. 남로당은 미군정의 압박으로 세력이 약화해 중앙이 지방을 통제하기 힘들었다.” 
4·3 발생 원인에 대한 정부 공식 입장은.  
“4·3 특별법은 ‘제주4·3사건이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 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과 그 진압 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고 정의한다. 시작 시점을 봉기가 일어난 1948년 4월 3일이 아니라, 1947년 3월 1일로 규정한 것은 발발 원인과 연관이 있다. 진상조사보고서는 1947년 3·1절 기념식 직후 일어난 경찰의 발포로 민간인 6명이 사망했지만, 사과는커녕 강경 진압으로 일관한 미군정과 경찰의 대응, 그리고 1948년 제주도민 3명 고문치사 사건 등을 4·3 발발의 주요한 원인으로 규정한다.”
 양정심 4·3평화재단 조사연구실장

양정심 4·3평화재단 조사연구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