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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한 장에 인생역전…日 명함의 마법, 한국서도 이곳 찾는다 [백년가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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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 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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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의 힘, 믿으십니까. 백년을 목표로 달려가는 가게, 혹은 이미 백년을 넘어서 수백 년의 역사를 쌓은 곳들은 어떤 이야기를 갖고 있을까요. 일본 동네 곳곳에 숨어있는 ‘백년가게’를 찾아가 지금 이 순간에도 시간을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는 상인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명함 한 장이 인생을 바꿔놓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는지. 특별히 ‘금박’이라도 두른 게 아닌데 입소문을 타 ‘출세하는 명함’ 소리를 듣는 곳이 있다. 일본 도쿄, 긴자(銀座)의 나카무라 활자(中村活字)다. 113년의 역사를 가진 이곳은 연관 검색어로 성공이나 출세란 단어가 붙을 정도. 언뜻 보기엔 그저 평범한, 다소 도톰한 질감의 새하얀 종이에 검은 글씨로 인쇄한 그런 소박한 명함이다.

올해로 113년이 된 일본 도쿄 긴자에 있는 나카무라활자의 나카무라 사장. 5대째로, 손잡이가 달린 판을 꺼내면 작은 납에 새겨진 글씨 조각들이 들어있다. 도쿄=김현예 특파원

올해로 113년이 된 일본 도쿄 긴자에 있는 나카무라활자의 나카무라 사장. 5대째로, 손잡이가 달린 판을 꺼내면 작은 납에 새겨진 글씨 조각들이 들어있다. 도쿄=김현예 특파원

글자를 손으로 심어 만드는 명함 

지난달 1일 오후 긴자에 있는 나카무라 활자를 찾았다. 조용한 골목에 있는 이곳은 긴자의 화려함은 찾아볼 수 없지만,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다.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니 나카무라 아키히사(中村明久·74) 5대 사장이 반긴다. 그의 등 뒤로 한눈에도 오래됨직한 나무장에 빼곡히 들어있는 활판들이 보인다. 활판인쇄는 글자가 새겨진 납 활자를 하나하나 심듯이 맞춰 글의 형태를 갖추게 한 뒤 잉크로 인쇄하는 방식. 글자를 하나하나 사람의 손으로 골라야 하는 아날로그로, 시간도 정성도 필요한 인쇄술이다.

나카무라 사장의 말이다. “예전엔 이 일대에 광고회사나 신문사, 출판·인쇄회사들이 몰려있었어요. 지금은 다 사라지고 우리 집 한 곳밖에 없지만요.”

긴자는 일본의 활판 문화 발상지로도 꼽힐 정도였지만 2차 세계 대전으로 모두 불타거나 디지털로의 흐름에 맞춰 인쇄소들이 하나둘 사라지면서 출판 인쇄 중심이란 이야기는 과거로 묻혔다.

일본 도쿄 긴자에 있는 나카무라활자. 도쿄=김현예 특파원

일본 도쿄 긴자에 있는 나카무라활자. 도쿄=김현예 특파원

‘성공하는 명함’이란 별칭과 인연

이곳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활판인쇄소가 되면서 공교롭게도 사람들은 이 희소성을 돌아봐 주기 시작했다. 양면으로 된 명함 100장을 만들려면 최소 1만5000엔(약 14만원)이란 꽤 비싼 돈을 내야 하지만 사람들이 찾아왔다. 활자라서였다. 이곳에서 만든 명함은 활자인쇄의 독특함이 살아있어 한눈에도 이곳에서 만든 명함이라는 걸 알아볼 수 있을 정도. 이 때문에 디자이너나 사진 작가, 프리랜서로 업을 새롭게 시작하는 젊은이들이 찾기 시작했다.

나카무라활자가 창업 100년이 되었을 때 만든 방명록. 손님들이 꾹꾹 눌러쓴 명함 이야기가 빼곡하다. 도쿄=김현예 특파원

나카무라활자가 창업 100년이 되었을 때 만든 방명록. 손님들이 꾹꾹 눌러쓴 명함 이야기가 빼곡하다. 도쿄=김현예 특파원

새로운 ‘구전’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이곳에서 첫 명함을 받아 사회로 나간 이들이 “이곳에서 명함을 만들고는 일이 잘 풀렸다”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것. 나카무라 사장이 만든 명함을 주고받는 사람들끼리 서로 알아보는 일도 있었다. 한 장의 명함이 이야기를 낳고, 그렇게 대화를 튼 사람들이 명함에 애착을 가져주고, 다시 방문하면서 ‘성공’이라는 간절한 바람은 믿음이 됐다.

“어떤 손님은 명함 뒷면에 가계도를 넣기도 하고, 어떤 손님은 자신의 얼굴 로고를 그려 넣기도 해요. 명함 하나하나에 하나의 인생과 이야기가 있는 거잖아요. 값싸게 만들 수 있는 명함이 천지인 시대지만, 우리 집에 오는 손님들이 신기하게 지금도 있기 때문에 일을 계속하고 있는 것 같아요.”

나카무라 사장이 두툼한 노트 한 권을 꺼내온다. 손님들이 쓴 이야기가 적힌 방명록이다. 정성스럽게 볼펜을 꾹꾹 눌러 적은 이야기들이다. 명함을 만들어서 상대방에게 이름뿐 아니라 생각을 전할 수 있어서 좋다거나,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게 됐다거나, 심지어 결혼했다거나, 사진 작가로 데뷔했다는 글들이 이어진다. 나카무라 사장이 웃는다. “눈이 침침한데, 활판인쇄를 계속하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명함이 인연을 만들어준다니 멋지잖아요? 다음 세대에도 활판인쇄를 잘 전달해주면 좋겠어요.”

간혹 외국 손님이 찾아와 없는 글자를 찾을 땐 활자를 새롭게 만들어서라도 명함을 제작한다고 나카무라활자 사장은 말했다. 도쿄=김현예 특파원

간혹 외국 손님이 찾아와 없는 글자를 찾을 땐 활자를 새롭게 만들어서라도 명함을 제작한다고 나카무라활자 사장은 말했다. 도쿄=김현예 특파원

“성공은 손님들이 노력해서…난 도울 뿐”

그가 가게 안쪽을 보여준다. 나무문을 지나 들어가니 은은하게 빛을 내는 납 활자들이 보인다. 이 글자들을 하나하나 뽑아서 명함을 만드는데, 꼬박 사흘이 걸린다. 나카무라 사장은 “활판 글씨에서 느껴지는 정겨움을 손님들이 알아주게 된 것이 가장 기쁘다”고 했다. 이곳에 있는 활자는 2만여개. 더러 한국이나 중국에서 손님이 찾아와 없는 한자로 명함을 만들어달라고 할 때가 가장 어렵다고 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면서 손에 잉크투성이인 그에게 물었다. 성공하는 명함 소리를 듣게 되는 기분이 어떠냐고 말이다. 나카무라 사장이 말했다. “명함은 자기 분신이기도 하잖아요. 받은 사람은 그걸 보고 준 사람을 떠올리게 되니까요. 명함은 제가 만드는 거지만 성공은 실제로 손님들이 자기 노력으로 이룬 것들이고요. 저는 그저 돕는 것뿐인 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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