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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신 아들도 그랬다…직접 안 때리면서 옥죄는 교묘한 '학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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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정순신 사태 계기로 본 학교폭력 실태

학폭 문제를 다룬 드라마 ‘더 글로리’의 한 장면. [사진 넷플릭스]

학폭 문제를 다룬 드라마 ‘더 글로리’의 한 장면. [사진 넷플릭스]

“에이 왜 그래? 친구끼리 장난 좀 친 거가지고.”

학교폭력(학폭) 피해자 김민섭(15세·가명)군은 매점에 가는 것이 두려웠다. 동급생 이모(15)군이 주도하는 무리는 김군을 교묘하게 괴롭혔다. 김군과 함께 매점에 간 뒤 “우리가 지갑을 안가져와서 그런데 오늘만 네가 내달라”며 꾸준히 금품을 갈취했다. 처음에는 친구들에게 간식거리를 사주는 정도라고 생각했지만 점점 강도가 세졌다. 김군의 물건을 빌려간 뒤 돌려주지 않거나 말없이 물건을 가져다 쓰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다. 김군이 다른 학급 학우의 욕을 했다며 억지로 싸움을 붙이고 김군이 자는 모습을 의도적으로 못생기게 찍어 반 아이들이 있는 카톡방에 공유해 일명 ‘박제’하기도 했다. 김군은 “처음에는 그저 이군 무리에게 따돌림을 당하는 것이라 생각했기에 이를 학교 폭력으로 신고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김군의 우울증은 심각해졌고, 일상 생활을 영위할 수 없는 단계가 돼서야 가족과 학교폭력대책심의위원회(학폭위)에 사정을 알렸다.

학폭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피해자가 20년 후 가해자에게 복수하는 내용을 다룬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는 고데기로 지지고 성희롱하는 장면이 나온다. 최우성 한국교사학회 학교폭력예방연구소장은 “너무 충격적인 장면이라 많은 분들이 경악했지만, 실제로 벌어진 사건을 재구성한 것”이라고 말했다. 2006년 청주의 한 중학교에서 고데기, 옷핀 등으로 상처를 입히고 집단 구타해 전치 5~6주의 상해를 입혔다. 가해자가 구속됐지만 보호관찰 처분을 받아 전과도 남지 않았다. 2020년에는 경남 하동의 청학동 기숙사에서 소변을 먹이는 등의 가혹행위가 벌어졌고, 2021년에는 경남 양산에서 외국 국적의 중학생을 집단폭행하고 이 장면을 동영상으로 촬영해 유포했다. 역시 가해자가 14세 미만 촉법소년이라 처벌이 제한적이었다.

드라마 속 학폭, 실제 사건 재구성

최근 학폭 미투, 드라마 등을 통해 경각심이 퍼지고 있지만 학폭은 줄어들지 않는다. 28일 교육부에 따르면 연 2만~3만건이던 전국 초·중·고교 학폭위 심의 건수는 코로나19로 원격수업이 실시되자 2020년 8357건으로 줄었다. 그러나 대면 수업이 재개되면서 2021년 1만5653건으로 다시 늘어났고 지난해 1학기에는 9796건이었다. 2학기를 포함하면 2만여 건에 달해 코로나 이전 수준으로 늘어난 것으로 추산된다.

직접 폭력을 행사하거나, 돈을 뺏는 방식의 학폭은 비중이 크지 않다. 교육부와 시·도 교육청이 매년 실시하는 학교폭력 실태 전수조사에 따르면 2020년 이후 언어폭력 비율은 41% 안팎까지 높아졌다. 2013~2020년 조사에서 언어폭력 비중이 33~35%대를 오갔던 것에 비하면 확연히 늘어난 셈이다. 신체 폭력 비중은 14.6%다. 이어 집단따돌림(13.3%), 사이버 폭력(9.6%), 스토킹(5.7%) 순이었다. 대신 점점 교묘한 방식으로 벌어지고 있다. 피해 학생의 가방이나 물병에 소변 등 이물질을 넣고 모른척하고, 시도 때도 없이 소셜미디어(SNS)에 피해 학생을 희롱하는 게시물을 올리고 공유하기도 한다. 댓글을 강요하는 경우도 있다. 특히 온라인의 익명성을 이용해 가해자가 누군지 특정하지 못하게 괴롭히는 경우가 문제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경기도 수원 소재 중학교에서 근무하는 교사 윤지영(32)씨는 “오픈 카톡방에 초대해 익명으로 욕설을 하고 익명 계정을 만들어 비방 메시지를 보내기도 한다”며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없기에 피해 학생 입장에서는 24시간 내내 스트레스에 시달릴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 뿐 아니다. 특정 아이를 타깃으로 잡으면 다른 아이들에게 그 아이와 팔로우를 끊으라든지, 카톡방에 초대하지 말라든지 하는 방식으로 괴롭힌다. 실제 오픈 카톡방이나 SNS의 경우 초대나 메시지를 거부할 수 없어 원천적으로 막기가 쉽지 않다. 거부하면 다음날 학교에서 더 큰 괴롭힘을 당하기 때문에 폭력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이런 온라인 학폭은 증거를 거의 남기지 않아 입증하는 것 자체부터 애를 먹인다. 학폭 사건을 주로 맡아온 양나래 변호사는 “물리적인 폭력은 일이 벌어지는 즉시 조치나 증거 수집이 가능한 반면 언어폭력은 매순간 아이를 서서히 갉아먹는다”고 말했다. 그는 “아이들이 욕할 때마다 일일이 녹음하다든지 온라인에 희롱하는 게시물이 올라와도 실제 작성자나 피해자를 특정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아 구제가 어려운 경우도 드물지 않다”고 안타까워 했다.

정순신 변호사의 아들이 다니는 서울대에 비판 대자보가 붙어 있다. [뉴시스]

정순신 변호사의 아들이 다니는 서울대에 비판 대자보가 붙어 있다. [뉴시스]

국가수사본부장에 임명됐던 정순신 변호사가 사퇴하는 계기가 된 아들의 학폭 사례도 강도 높은 언어 폭력을 자행한 경우다. 특히나 명문으로 알려진 기숙형 사립고등학교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점이 충격을 더했다. 법원 판결문에 따르면 정 변호사 아들 정모군은 2017년 고교 입학한 후 1년 가까이 동급생 A군에게 “빨갱이” “제주도에서 온 돼지” 등의 언어 폭력을 지속적으로 가했다. 또 A군과 같은 동아리였던 정군은 “말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투표를 통해 A군을 동아리에서 내보냈다. A군은 정군의 이름이 언급될 때마다 온 몸이 떨리는 패닉 현상에 빠졌고,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의 불안 및 우울을 겪었다. 극심한 스트레스로 성적은 곤두박질쳤다. 결국 이듬해 3월에는 극단적 선택을 시도하기도 했다.

최우성 소장은 “최근에는 어른들 눈에 ‘이것도 학폭이 될 수 있나’ 싶은 사례도 정말 많고, 코로나 이후로는 폭력의 양상이 온라인으로 옮겨 가기도 한다”며 “이런 추세를 학부모와 교사가 미리 알지 못하면 자칫 내 아이들이 범죄자가 되는 것을 지켜볼 수도 있다”고 전했다.

아이들 스스로도 무엇이 학폭인지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교육부에 따르면 학교 폭력 피해 미신고 이유 중 ‘별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서(30.4%)’가 가장 많았다. 이어 스스로 해결하려고(21.1%), 이야기해도 소용이 없을 것 같아서(17.3%), 선생님이나 부모님의 야단 걱정 때문에(14.4%), 더 괴롭힘을 당할 것 같아서(14%) 순이었다. 법률사무소 사월의 노윤호 대표 변호사는 “가해 학생들이 언어 폭력으로 피해 학생들을 가스라이팅하는 방식도 다양해지다 보니 나중에 사건을 조사를 해보면 가해자들이 구속까지 될 정도의 중대한 사유였음에도 겉보기에는 이게 정말 친구 사이의 장난에 불과한 건지 알 수가 없을 정도로 치밀한 사건들도 있다”고 전했다. 박옥식 한국청소년폭력연구소장은 “교사와 부모도 과거처럼 ‘애들끼리 욕 좀 할 수 있지’라는 식으로 넘어가던 언어 폭력에 대한 생각을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교육부, 이달 말 학폭 근절 대책 예정

문제가 불거지면 학교에서 조사하고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최우성 소장은 “학폭 업무를 아무도 맡으려 하지 않다보니 담당자가 자꾸 바뀌고 전문성이 떨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된다”며 “학교에 ‘생활지도 수석교사’ 또는 ‘학교폭력 전문조사관’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학폭 전문인 이호진 변호사는 학폭위의 전문성을 높이는 것 또한 시급하다고 조언했다. 그는 “판사 역할을 하는 학폭 위원에 경찰이나 변호사 등 전문적인 법률 도움을 줄 수 있는 인원을 의무적으로 참석시키는 개선안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교육 현장의 재편만으로는 학폭이 쉽게 줄어들지 않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양나래 변호사는 “단순히 학폭을 저지르면 생활기록부에 기재한다는 식의 압박만으로는 경계가 모호한 언어 폭력을 근절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학폭 조사 자체가 학교 측의 재량이기 때문에 학교마다, 사안마다 차이가 극명하게 갈린다. 동료 학생들을 대상으로 조사가 필요해도 학부모들이 “조용히 공부하는 아이를 조사한다고 흔들었다가 입시에 악영향을 미치면 책임질거냐”고 반발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이호진 변호사는 “관련법에 ‘피해자가 조사를 요구했을 때 학교 측에서 의무적으로 특정 조사를 해야 된다’는 조항이 생기면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국회에는 전학 등 중대한 학폭위 조치 사항의 생활기록부 보존 기간을 10년까지 연장하는 내용의 초·중등교육법 일부 개정법률안이 계류돼 있다. 한국대학교육협의회는 학폭 가해자로 밝혀질 경우 입학을 취소하는 방안을 검토중이다. 교육부는 이달 말쯤 학폭 근절 대책을 발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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