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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 “동북 패권 쟁취 후 대문 닫아라” 린뱌오에 전문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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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9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65〉

장제스와 두위밍(오른쪽). [사진 김명호]

장제스와 두위밍(오른쪽). [사진 김명호]

일본 패망 3주 후 1945년 9월 14일 오후, 홍색 수도 옌안(延安)의 둥관(東關) 비행장 상공에 소련 군용기 한 대가 나타났다. 착륙 후, ‘중공 지둥군구(冀東軍區)’ 사령관이 소련군 장교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선양(瀋陽)에서 왔다. 당 중앙과 군사위원회에 보고할 일이 있다.” 마오쩌둥은 충칭(重慶)에서 장제스(蔣介石·장개석)와 평화회담 중이었다. 사령관의 마오 대신동북사정 보고와 소련군 장교의 의견을 들은 부주석 류샤오치(劉少奇·유소기)가 정치국회의를 열었다. 동북공작과 소련군과의 합작을 위해 정치국원 두 명을 동북에 파견하기로 합의했다.

8로군·신4군, 직급 있지만 계급은 없어

중·일 전쟁 승리 후, 옌안의 미국 사진기자가 찍은 린뱌오. [사진 김명호]

중·일 전쟁 승리 후, 옌안의 미국 사진기자가 찍은 린뱌오. [사진 김명호]

1988년 11월, 전 ‘전인대 위원장’ 펑쩐(彭眞·팽진)이 43년 전을 회고했다. “당 중앙은 소련군 철수 후 동북의 군·정을 이끌 동북국 설립을 결정했다. 나와 천윈(陳雲·진운), 우슈취안(吳修權·오수권) 등 5명을 동북국 위원으로 선정했다. 9월 15일 오전 소련 군용기를 타고 선양으로 갔다.” 군인은 계급이 중요했다. 졸병은 졸병을 상대하고, 장군은 장군을 상대하기 마련이다. 중공 직할 8로군과 신4군은 특이한 군대였다. 직급은 있어도 계급은 없었다. 동북에 주둔중인 소련군 장군들을 만나려면 걸맞은 계급이 필요했다. 계급장은 물론, 멀쩡한 군복도 없다 보니 마오쩌둥 명의로 중국어와 러시아어로 작성한 계급 임명장을 들고 갔다. 펑쩐과 천윈은 중장, 우슈취안은 소장, 나머지는 대교(우리의 대령급)였다. 임시 계급이었지만 자격은 넘치는 사람들이었다.

중도에 비행기 사고로 3일 만에 선양에 도착한 펑쩐 일행은 전 동북왕 장쭤린(張作霖·장작림)의 관저에 ‘중공 중앙 동북국’을 차렸다. 관내에서 꾸역꾸역 몰려오는 8로군과 신4군을 소도시와 촌락, 산간지역으로 분산시켰다. 10월 26일, 선양에서 열린 동북국 간부회의에서 펑쩐이 기염을 토했다. “우리가 먼저 동북에 왔다. 장제스 군은 아직 동북 문전에도 못 왔다. ‘선도위군, 후도위신(先到爲君, 后到爲臣)’, 먼저 오는 사람이 군림하고, 후에 오는 사람은 신하가 되는 것이 만고의 철칙이다. 우리는 이미 40여개 지역을 접수했다. 전 동북을 쟁취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다. 11월 15일 소련군이 철수를 시작한다. 늦어도 12월 2일이면 완전히 동북을 떠난다. 현재 선양, 하얼빈(哈爾賓), 창춘(長春), 3개 대도시는 소련군 수중에 있다. 11월과 12월, 2개월간 장제스 부대의 상륙을 저지하면 동북 독점이 가능하다.”

린뱌오는 비적 소탕으로 민심을 얻었다. 처형 직전의 친일 비적두목 셰원둥(謝文東). [사진 김명호]

린뱌오는 비적 소탕으로 민심을 얻었다. 처형 직전의 친일 비적두목 셰원둥(謝文東). [사진 김명호]

10월 20일, 마오쩌둥이 산둥(山東)에 있는 린뱌오(林彪·임표)에게 전문을 보냈다. “사오징광(蕭勁光·소경광)과 함께 선양으로 가라.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린은 부인 예췬(葉群·엽군)과 함께 당나귀가 끄는 작은 마차를 타고 장도에 올랐다. 동북국도 마오가 보낸 전문을 접수했다. 전력을 다해 동북의 패권을 쟁취한 후, 동북의 대문을 닫아버려라. 안둥(安東)과 잉커우(營口)항의 수비를 견고히 하고, 산하이관(山海關)과 진저우(錦州)에 정예를 배치해 국민당 군의 선양 진출을 막아라. 불가능하면 충돌을 피하는 대신 화북과 동북의 자치를 승인하라고 장제스를 압박할 생각이다.”

10월 25일 새벽 산하이관에 도착한 린뱌오는 정신이 없었다. 미국 담배 냄새와 라이터, 전등, 전화기 소리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경비사령관이 건넨 말보로 한 개비를 코에 살짝 대보곤 집어 던졌다. 3일 후 동북국이 보낸 열차를 타고 진저우로 갔다. 마중 나온 황푸군관학교 동기생의 안내로 3일간 주변 지형을 살폈다. 린뱌오가 동북으로 갔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총사령관 린뱌오, 사사건건 펑쩐과 충돌

보급을 위해 동원된 동북민주연군 들것(担架)부대. [사진 김명호]

보급을 위해 동원된 동북민주연군 들것(担架)부대. [사진 김명호]

린뱌오의 부임을 앞두고 펑쩐과 천윈이 소련군과 교섭했다. “소련 공산당과 중국 공산당은 형제정당이다. 선양, 창춘, 하얼빈에 중공 동북민주연군(자위군 혹은 자치군)의 주둔을 허락하기 바란다.” 소련군은 거절했다. “자치군은 뭐고, 민주연군은 또 뭐냐. 민주타령 즐기는 사람치고 민주적인 인간 본 적이 없다. 중국의 합법적인 정부는 국민정부다. 우리가 철수하고 정부군이 주둔하기 전에 선양을 떠나라. 거부하면 탱크로 밀어 버리겠다.” 29일 밤, 소련군은 린뱌오가 탄 열차의 선양역 진입도 제지했다. ‘전쟁이 유일한 취미’라는 것이 이유였다. 교외의 작은 역에서 터덜거리는 승용차로 동북국에 도착한 린을 천윈과 우슈취안이 정중히 맞이했다.

10월 29일, 린뱌오가 선양에 나타났다. 훗날 무전병이 구술을 남겼다. “차 에서 내린 린뱌오의 몰골은 가관이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먼지투성이였다. 휘청거리며 동북국 문턱을 넘었다. 바닥에 쓰러져 코를 골았다.” 동북민주연군은 동북국 산하였다. 서기 펑쩐과 부서기 천윈은 중앙당 정치국원이었다. 린뱌오는 중앙위원에 불과했다. 동북국 위원도 아니었다. 린은 평소 펑쩐을 우습게 봤다. “전쟁이 뭔지 모른다. 큰소리만 치는 훈수꾼이다.” 천윈에게도 후한 점수를 주지 않았다. “상하이에 널려있던 노동운동가 출신이다. 주판알 튕기는 집사가 딱이다.”

총사령관 린뱌오는 첩첩산중, 사사건건 펑쩐과 충돌했다. 동북인들은 국민정부를 중국의 합법 정부로 인정했다. 8로군과 신4군으로 구성된 동북민주연군을 비적 취급했다. 총사령관 자격으로 동북국 회의에 참석한 린이 단안을 내렸다. “사령부와 동북국을 하얼빈으로 이전한다.” 린뱌오의 전쟁이 시작됐다. 첫 상대는 그 유명한 두위밍(杜聿明·두율명)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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