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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줄 대신 13줄 쉬운 바둑, 치매 막고 친구 얻는 묘수 두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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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9호 25면

[스포츠 오디세이] 서효석 대한바둑협회장

서효석 대한바둑협회장이 서울 서초구 편강한의원에서 바둑 삼매경에 빠져 있다. 최영재 기자

서효석 대한바둑협회장이 서울 서초구 편강한의원에서 바둑 삼매경에 빠져 있다. 최영재 기자

“침묵 속에서 죽을힘을 다해 싸우는 게 좋아서요. 상대가 공들여 지은 집을 무너뜨려야 이기는 것도 맘에 들고.”

3월 10일 파트2가 업로드 되는 넷플릭스 화제작 ‘더 글로리’에 나오는 송혜교의 대사다. 고교 시절 학교폭력 피해자 문동은(송혜교 분)은 가해자 박연진(임지연 분)을 향한 치밀한 복수를 준비한다. 박연진의 남편에게 접근하기 위해 송혜교는 바둑을 배우고, 바둑을 함께 두면서 남자와 친해진다. 거대한 바둑판과 바둑돌로 꾸민 극중 바둑공원(인천 청라호수공원 내) 세트장은 ‘글로리 성지’로 떴다.

드라마에서는 바둑이 처절한 복수의 수단으로 등장하지만 실제 바둑은 가장 비폭력적인 게임이자 두뇌 스포츠다. 바둑에는 무궁무진한 수가 있고, 상대가 둘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침묵의 미학이 있다. 그러나 4000년 역사를 자랑하는 바둑은 지난 세기에 등장한 컴퓨터와 온라인 게임에 밀리고 있는 형국이다. 2016년 인공지능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대국으로 반짝 관심을 끌었지만, 눈 깜짝할 틈도 주지 않는 온라인 게임에 익숙해진 젊은 세대에게 바둑은 어렵고 지루한 오락이다. 국내에 하나뿐인 명지대 바둑학과도 명지전문대와의 통합 과정에서 폐과될 위기에 놓여 있다.

바둑학과 폐지 막으려 광고 내기도

지난해 3월, 제 8대 대한바둑협회장에 당선된 서효석 회장은 이같은 바둑의 위기를 도약의 기회로 뒤집어버릴 묘수를 찾고 있다. 13×13줄의 ‘쉬운 바둑’을 보급하고, 초고령화 시대 숙제인 치매 예방을 위해 어르신들에게 바둑과 친구가 되게 해 주고, 미국에서 1000명이 동시에 대국하는 바둑 축제를 열겠다고 한다.

서 회장은 ‘편강탕 신화’를 이룬 편강한의원 대표원장이다. 그는 투박하고도 기발한 광고와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편강탕을 널리 보급했다. 서울 서초동에 있는 편강한의원 본원에서 서 회장을 만났다.

13줄 쉬운 바둑 보급에 사활을 거셨다면서요.
“맞습니다. 바둑이 두뇌 발달과 집중력 향상 등에 더할 나위 없이 좋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바둑은 배우기가 어렵고 시간을 너무 많이 잡아 먹는다’는 인식이 강하게 퍼져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19×19줄 바둑을 배우기 전에 13×13줄 바둑으로 입문하자는 겁니다. 13줄 바둑은 배우기도 쉽고 한 판을 20분 안에 끝낼 수 있으니 여러 판을 둬도 크게 시간을 소비하지 않습니다. 경기도 부천시에 있는 초등학교에 13줄 바둑을 보급하고 있는데, 10시간 정도만 가르치면 아이들이 끝내기까지 다 하더라고요.”
바둑이 치매 예방에 실제로 도움이 되나요?
“권준수 서울대 정신의학과 교수 연구팀이 바둑을 둔 집단과 그렇지 않은 집단의 뇌를 비교 관찰한 논문을 냈어요. 바둑을 둔 집단은 정서 처리와 직관적 판단에 관여하는 편도체와 안와전두엽 부위, 공간적 위치 정보를 처리하는 두정엽 부위가 활성화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바둑이 통찰력과 직관적 판단력, 공간지각력을 키워준다는 뜻이죠. 한·중·일 프로기사 출신 중 치매 환자는 한 명도 없습니다. 일본의 스기우치 8단은 올해 96세인데 지난해 성적이 2승 7패입니다. 손흥민이 60세에 프리미어리그에서 골 넣은 것과 비슷한 거죠. 하하.”
그래서 ‘60에 바둑을 배워 70에 치매를 예방하자’는 슬로건을 만드신 거네요.
“우리나라 노인 여섯 명 중에 한 명이 치매라고 합니다. 앞으로 다섯 명, 네 명 중 한 명으로 늘어나겠죠. 학자들은 2050년이 되면 치매로 인한 사회적 비용이 106조원이 될 거라고 하는데, 제가 볼 땐 150조는 넘을 것 같습니다. 현재로는 치료약도, 백신도 없어요. 예방이 최선의 방책이라는 건데, 바둑을 통해 두뇌를 자극하는 게 가장 좋은 예방법이라고 믿습니다.”
서울 강남구에서 어르신 바둑 보급에 나섰다고 합니다.
“지난해 12월에 제가 한 일간지에 ‘명지대 바둑학과 폐지 계획을 강력히 반대한다’는 전면광고를 냈어요. 그걸 보고 강남구 복지재단에서 연락이 왔죠. ‘노인은 친구가 없어서 고독해지기 쉬운데 바둑을 배우면 친구를 얻게 된다’는 내용까지 넣어서 강남구청장을 설득했죠. 강남구를 시작으로 어르신 바둑 보급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될 겁니다.”
13줄 바둑을 두는 모습. 13줄은 배우기 쉽고 시간도 오래 걸리지 않는다. [사진 대한바둑협회]

13줄 바둑을 두는 모습. 13줄은 배우기 쉽고 시간도 오래 걸리지 않는다. [사진 대한바둑협회]

유럽에서는 13×13줄을 중심으로 바둑이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다고 한다. 사우디아라비아가 마인드 스포츠 육성종목으로 바둑·체스·브리지를 선정해 약 42조원의 예산을 배정했다는 뉴스도 나왔다. 지난해 사우디는 김명환 8단을 바둑 지도자로 초청하기도 했다. 서효석 회장은 이 여세를 몰아 내년 미국에서 ‘쉬운바둑 페스티벌’을 개최할 계획도 진행 중이다.

미국에서 여는 바둑 이벤트는 뭔가요,
“미국은 바둑(BADUK)보다는 일본식 표기인 ‘고(ご)’에 익숙합니다. ‘이지고(Easy GO) 페스티벌’이라는 이름으로 내년 9월 15일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1000명이 동시에 대국하는 장관을 연출할 겁니다. 13줄 바둑판을 제공하고 바둑 경기복도 디자인해서 입힐 거고요. 미국바둑협회와 대한바둑협회가 공동 주관하는 이 대회를 중국과 미국 방송국을 통해 전 세계에 중계하는 것도 추진 중입니다. ‘바둑을 통해 미국 청소년들을 총기 사고의 위험에서 구하겠다’는 메시지를 던질 겁니다.”

회장 취임하며 시진핑에 대국 제안

바둑의 세계화를 야심차게 추진 중이신데전망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주도권을 갖고 중국·일본과 힘을 합치고 미주와 유럽까지 끌어들인다면 우리나라가 바둑의 종주국이 될 수 있습니다. 공인 6단인 제가 지난해  취임하면서 시진핑 주석에게 대국을 제안한 것도 그런 포석입니다. 궁극적으로 가고자 하는 건 올림픽 진입이죠. 아시안게임 종목이기도 하니 하계올림픽 종목으로 들어가면 좋겠지만 그게 힘들다면 동계 쪽도 타진하기 위해 아이디어를 모으고 있습니다.”

전북 전주 출신인 서 회장은 경희대 한의학과가 만들어진 해 수석 입학했다. 어릴 적부터 편도선염이 워낙 심했던 그는 ‘내 병도 못 고쳐서 양의사에게 진료 받는 게 부끄럽다’며 각고의 노력 끝에 1973년 ‘편강탕’을 개발했다. 이후 편강탕은 50년 동안 편도선염과 감기에 탁월한 효능을 인정받았다.

그는 요즘은 ‘깨끗한 폐가 건강의 첫걸음’이라는 청폐(凊肺) 운동을 펼치고 있다. 매일 아침 경기도 산본의 자택 근처 수리산을 한시간 반 동안 등산한 뒤 대중교통으로 출근한다.

서 회장은 “편강탕을 개발한 열정과 편강한의원을 최고의 한의 의료기관으로 키운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바둑의 세계화에 진력하겠습니다. 이 사명이 내 필생의 끝내기가 될 겁니다”라며 호탕하게 웃었다.

‘쇼트트랙+바둑’ 하이브리드 종목, 겨울올림픽 가능할 듯

김정효 서울대 외래교수

김정효 서울대 외래교수

동계올림픽에는 ‘얼음판 위의 체스’라 불리는 컬링 종목이 있다. ‘얼음판 위의 바둑’을 올림픽에서 만날 수 있을까. 가능하다고 본다. 물론 바둑 단일 종목으로는 어렵다. 다른 종목과 하이브리드를 거쳐야 한다. 스키와 사격을 합친 바이애슬론이 동계올림픽 정식종목이 된 것처럼.

예컨대, 쇼트트랙과 바둑을 섞는 것이다. 쇼트트랙(둘레 111m) 가운데 13줄 또는 9줄 바둑판을 두고, 일정 숫자의 돌을 놓은 뒤 트랙을 한 바퀴씩 도는 것이다. 승패는 바둑 경기 집 수와 스케이팅 속도를 합산해 가린다. 릴레이 방식의 단체전도 가능하다.

오늘날 인류가 즐기는 스포츠는 대부분 서양에서 만들어져, 제국주의 배를 타고 전 세계로 퍼졌다. 이를 근대스포츠라 부르는데, 근력과 순발력 등 남성 중심의 운동이다. ‘CITUS(빠르게), ALTUS(높게), FORTUS(강하게)’라는 올림픽 이념은 근대스포츠가 추구하는 바를 잘 드러낸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근대가 아닌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살고 있다. 근대적 현상은 새로운 것으로 대체된다. e스포츠가 당당히 스포츠 대접을 받는 이유도 스포츠를 바라보는 패러다임의 변화 때문이다. 사격이 스포츠라면 e스포츠도 올림픽 정식종목이 될 수 있다. 비보이가 파리올림픽에 입성했듯이 말이다. 스포츠의 포스트모더니즘은 원심력적인 운동(힘을 위주로 하는 대근 운동)에서 소외되었던 구심력적 운동(정확성과 계산을 위주로 하는 미세 운동)을 끌어낸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중심보다 주변과 소수자, 순혈보다는 혼종과 하이브리드의 가치를 지지한다. 동계 종목과 바둑의 만남은 근력과 두뇌의 융합을 이루는 매우 흥미로운 미래형 스포츠가 될 수 있다.

김정효 서울대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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