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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3중고, 한국 수출엔진 꺼져간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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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9호 0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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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되는 수출 감소세와 무역수지 적자, 근로자들의 이탈로 제조기업들이 고사위기에 몰렸다. 지난달 27일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목내동 시화산업단지 인근의 한 공장. 오랜 기간 일이 없어 가동 중지된 기계들을 공장 관리자가 홀로 점검하고 있다. 최기웅 기자

계속되는 수출 감소세와 무역수지 적자, 근로자들의 이탈로 제조기업들이 고사위기에 몰렸다. 지난달 27일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목내동 시화산업단지 인근의 한 공장. 오랜 기간 일이 없어 가동 중지된 기계들을 공장 관리자가 홀로 점검하고 있다. 최기웅 기자

지난달 23일 찾아간 경기도 파주의 액정표시장치(LCD) 산업단지는 황량했다. 공장 곳곳이 문을 닫았고 불이 켜진 곳도 인적이 드물었다. 세계 LCD 산업의 ‘메카’라던 과거의 활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인근의 한 편의점 직원은 “지난해 하반기부터 공장들이 (상황이) 많이 안 좋아지면서 폐업하고 있다”고 전했다. 인근의 공인중개업소에선 “앞으로 못 버티고 경매에 나오는 매물이 더 많아질 것”이라며 “수출 경기 악화로 대기업이 생산량을 줄이다보니 협력업체들도 일감이 급감한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반도체·자동차처럼 한국의 주요 수출품 중 하나인 디스플레이 생산 거점인 이곳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단지 안쪽에서 한 중소기업 관계자를 만나봤다. 그는 “LG디스플레이가 2006년부터 LCD TV 패널을 생산하던 단지 내 P7 공장이 지난해 12월부터 가동을 중단했다”고 말했다. 수년간 이어진 중국발 저가 제품 공세에 과거 수출 효자였던 LCD 사업을 접고, 사업 포트폴리오를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위주로 재편한 결과다. 그는 “기존에 LCD 분야의 전자 부품을 다루던 협력업체들이 영향을 받았다”며 “우리 회사도 수출 쪽에서 많이 어려워졌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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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인 지난달 24일엔 경기도 시흥·안산의 시화국가산업단지로 향했다. 자동차부품의 금속 가공 등을 하는 중소기업들이 모인 단지다. 이곳에서도 차량·사람의 이동을 보기 힘들었다. 현장에서 만난 50대 중반의 기업인은 “수개월간 매출이 40%가량 줄었다”며 “대기업 일감이 급감하면서 부품 주문이 뚝 끊겼다”고 말했다. 현장에 공업용품 등을 납품하는 가게가 밀집한 시화유통상가에서 만난 상인은 “1층에 있는 20개 업체 중 4곳은 문을 닫았다”며 “평일 정오 이후 가게 문이 닫혀 있으면 사실상 폐업 또는 휴업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국 경제를 지탱하는 수출에 빨간불이 켜졌다. 공장과 관련 상가는 속속 문을 닫고 있고, 버티고 있는 곳들은 일감이 뚝 끊겼다. 대기업의 철수나 부진이 중견·중소기업의 연쇄 위기로 이어지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지난달 한국의 전체 수출액은 501억 달러로 전년 동월 대비 7.5% 감소했다. 특히 최대 교역국인 중국에 대한 수출액은 지난달 98억8100만 달러로 24.2% 급감했다. 그 결과 무역수지도 지난달 53억 달러 적자로 지난해 3월부터 12개월째 적자를 이어갔다. 26년 만의 일이다.

지난해 정부가 글로벌 거시경제 상황 급변에 따른 원자재 가격 및 환율·금리 급등이라는 삼고(三高)를 수출 악화 배경으로 진단했다면, 최근엔 여기에 ‘신(新) 삼고(三苦)’가 추가됐다. 반도체 등의 재고 과잉, 공급망 위기를 심화시키는 세계 경제의 분절화, 그리고 인력난이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주력 산업의 사이클이 상당히 나빠진 상태에서 국내·외 악재가 가득하다”며 “정부가 큰 위기감을 갖고 대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일감 끊겨 불꺼진 파주·시화 산업단지 폐허처럼 황량…국내 공장 10곳 중 3곳 휴·폐업

적막감이 감도는 경기도 안산시 산업단지 내의 한 공장. 수출 부진에 국내 제조업 평균가동률은 70%까지 떨어졌다. 최기웅 기자

적막감이 감도는 경기도 안산시 산업단지 내의 한 공장. 수출 부진에 국내 제조업 평균가동률은 70%까지 떨어졌다. 최기웅 기자

#지난달 24일 경기도 시흥·안산의 시화국가산업단지는 정오가 지나도록 차량이나 사람의 이동을 보기가 힘들었다. 인근의 반월국가산업단지, 인천 남동인더스파크와 함께 국내 3대 중소기업 중심 산업단지로 꼽히지만 이곳에서 만난 기업인들은 “지난해부터 원자재 가격이 너무 올라 수출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금속 가공 분야에서 주로 동남아로 향하는 일감을 받아왔다는 60대 후반의 공구업체 대표는 “불경기가 이어지면서 최근엔 그런 일감이 아예 없어졌다”고 토로했다.

#미국이 중국을 겨냥해 반도체 수출 제한 조치에 나서자, 중국은 물러서지 않고 대대적 투자로 맞불을 놓기로 했다. 2일(현지시간) 블룸버그는 미국 정부 자료를 인용해 중국 정부가 반도체 기업 양쯔메모리(YMTC)에 129억 위안(약 2조4500억원)의 지원금을 주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YMTC는 중국 1위 메모리반도체 기업이다. 한국의 최대 수출품인 반도체 분야에서 삼성전자·SK하이닉스와 겨루는 최대 라이벌 중 하나다. 블룸버그는 “이번 투자는 중국 정부가 반도체 산업을 활성화하기 위해 다시 막대한 자금을 쏟아붓는 신호탄이 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무역적자 두 달 만에 작년의 40% 육박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한국 경제를 지탱하는 수출에 비상이 걸렸다. 급감한 일감, 경쟁국의 굴기(倔起)에 대기업도 중소기업도 반전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 채 신음 중이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지난달 한국의 전체 수출액은 501억 달러로 전년 동월 대비 7.5% 감소했다. 그나마 다소 개선된 수치다. 1월엔 463억 달러로 16.6%나 감소했다. 지난해 4분기(10월 -5.8%, 11월 -14.2%, 12월 -9.7%)부터 5개월 연속 심각한 수출 부진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지난달에도 ▶반도체(-42.5%) ▶디스플레이(-40.9%) ▶바이오헬스(-32.1%) ▶석유화학(-18.3%) 등 주력 수출 분야의 수출액 감소세가 두드러졌다.

수입 대비 수출 부진이 두드러지면서 무역수지도 지난달 53억 달러 적자로 지난해 3월부터 12개월째 무역적자를 기록했다. 1월(-126억9000만 달러)까지 합한 올해 누적 적자액은 180억 달러가량이다. 단 두 달 만에 사상 최대치였던 지난해 무역적자의 39% 수준을 기록한 것이다. 무역적자가 12개월 이상 이어진 것도 외환위기 직전인 1995년 1월~1997년 5월 이후 26년 만이다. 이대로는 과거 외환·금융위기 무렵 못잖은 경제적 위기 상황에 처할 가능성이 크다는 지적이 나온다.

물론 무역수지에 과도하게 연연할 필요는 없다는 분석도 있다. 한국 경제가 고도화하면서 제조업 이외의 분야도 성장한 데다, 대기업들은 과거처럼 국내가 아닌 해외를 주요 생산 거점으로 삼고 있어서다. 무역수지는 국내 생산품의 수출을 집계한다. 원자재 확보에 혈안이 된 요즘 같은 시대에 국내 기업이 해외에 진출해 공장을 지어 제품을 만들면 무역수지엔 마이너스인 셈이다. 이렇게 국내 기업의 해외 법인으로부터 받은 배당소득과 이자 등은 본원소득수지로 경상수지에 포함된다. 실제로 한국의 경상수지는 지난해 298억3000만 달러(약 38조8000억원) 흑자였다. 본원소득수지 흑자도 2020년 134억8690만 달러에서 지난해 228억8420만 달러로 급증했다.

다만 국가 경제의 건전성과는 별도로 수출액 자체가 뚜렷한 감소세인 것은 문제다. 일자리를 많이 만드는 것은 결국 제조업이고, 수출 감소로 무역수지가 적자를 낸다는 것은 그만큼 좋은 일자리가 줄어든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활기를 잃은 수출 현장의 분위기도 통계로 나타난다. 통계청에 따르면 국내 제조업 평균가동률은 지난해 9월 75%에서 12월 70.3%로 뚝 떨어졌다. 국내 공장 10곳 중 3곳은 폐업 또는 휴업 상태라는 의미다.

지난해 정부가 글로벌 거시경제 상황 급변에 따른 원자재 가격 급등 및 환율·금리 급등이라는 ‘3고(高)’를 수출 악화 배경으로 진단했다면, 최근엔 여기에 ‘신(新) 삼고(三苦)’가 추가됐다. 첫째, 재고 과잉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달 국내 반도체 재고는 전월 대비 28% 급증했다. 이는 1996년 2월(전월 대비 41.3% 증가) 이후 27년 만에 최대 수준이다. 전년 동기보다는 39.5% 늘었다. 글로벌 수요 부진으로 가격이 하락하면서 반도체 재고가 그만큼 쌓이고 있는 것이다. 이는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한국 수출 선봉장들의 수출 감소와 수익성 악화 지속을 의미한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실제 삼성전자의 재고자산은 이미 지난해에 사상 처음 50조원을 돌파했다(52조1878억원, 2021년 대비 20.7% 증가). 반도체 업종만의 얘기가 아니다. 금호석유화학 관계자는 “타이어 등에서도 재고를 쌓아둘 만큼 생산이 많이 들어갔다”며 “재고가 쌓여 있으니 고객사들이 주문을 조금씩 미룬다든가 주문량을 줄이는 식으로 대응해 수요가 급감하는 악순환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추광호 전국경제인연합회 본부장은 “재고 과잉은 눈앞의 수출 감소뿐 아니라 기업들의 투자 또는 고용 위축으로 이어지면서 실물경제 침체를 계속 부추길 것”으로 우려했다.

둘째, 세계 경제의 분절화다. 국제통화기금(IMF)은 1월 보고서에서 “수십 년에 걸친 경제적 통합의 시대를 뒤로하고, 최근 지정학적 분절화 리스크가 커져 전 세계 국내총생산이 최대 7%, 일부 국가의 경우 8~12%까지 줄어들 수 있다”고 전망했다. 이 때문에 각국이 인플레이션(물가 상승) 안정을 위한 일관된 통화정책을 펼치면서, 러시아·우크라이나 간의 전쟁과 미국·중국 간의 갈등과 같은 위험한 상황을 안정시키고 자유무역 체제 회복에 전념해야 한다고 IMF는 지적했다.

갈라진 세계, 생산비용 높여 인플레 심화

경기도 시화유통상가 곳곳엔 매물로 나온 공실이 보인다. 최기웅 기자

경기도 시화유통상가 곳곳엔 매물로 나온 공실이 보인다. 최기웅 기자

세계 경제의 분절화는 각국의 자국보호주의 심화와 이에 따른 공급망 재편 가속화로 이어진다. 이는 한국으로선 수출에서 기존에 누렸던 가격 경쟁력이 약화함을 의미한다. 박양수 한국은행 경제연구원장은 “세계 경제의 분절화로 생산비용이 높아지면서 제조업의 위기와 인플레이션 압박도 심화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주현 산업연구원장은 “세계 경제 분절화는 단기간 해결될 문제가 아니란 점에서 더 우려된다”며 “원자재를 수입해 제품을 만들어 파는 제조업으로 먹고 사는 한국은 주요 원자재 공급 중단 등 수출 위협에 맞서 원자재 수입선 다변화 등 대책 마련에 힘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셋째, 인력난 심화다. 특히 국내 제조업을 지탱하는 주조·금형 등 ‘뿌리산업’에 속한 중소기업 쪽의 인력난이 심각한 수준이다. 기업들은 고금리와 불경기로 임금을 줄 여건이 악화한 반면, 근로자들은 인플레이션 여파로 일당이 높아지면서 이를 챙겨줄 여력이 있는 업종으로 대거 이탈 중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3년간 외국인 근로자의 이탈이 가속화한 것도 작용했다. 김윤정 시흥시 소부장경영인협회 팀장은 “시화 산업단지만 봐도 생산 인력이 태부족하고 청년들도 (임금 등 근로 여건이 열악한) 여기로 취업하려 하지 않는다”며 “기업들이 운이 좋게 일감을 얻는다 해도 인력 부족으로 다시 주저앉고 있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이 같은 신 3고까지 고려해 정부가 특단의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조의윤 한국무역협회 수석연구원은 “특히 중소기업들은 주 52시간 근무제에 따른 인력난과 생산성 악화에 대한 고충을 많이 토로하고 있다”며 “법인세 인하나 연구·개발(R&D) 투자세액공제에 대한 요구도 많다”고 말했다. 그는 이를 토대로 “자동차부품처럼 수요에 따른 생산 조절이 중요한 품목의 경우 주 52시간 근무제에 대한 보완이 한층 시급하다”며 “수익성 감소세가 가파른 전기·전자나 반도체 업종의 경우는 R&D 경쟁력이 시급하기 때문에 투자세액공제가 중요하다”고 분석했다.

경쟁력 회복 도울 ‘K칩스법’ 통과 시급

디스플레이 등 중국의 저가 공세로 고전 중인 수출 업종에서도 정부의 맞춤 지원을 바라고 있다. LG디스플레이 관계자는 “레드오션에서 벗어나기 위해 투명 디스플레이 등 신기술 개발에 힘쓰고 있다”며 “시장 형성 초기 단계이기 때문에 그 기반을 잘 다지기 위한 R&D 투자가 정부 차원에서 이어진다면 큰 힘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국회 문턱에 가로막힌 수출 관련법의 조속한 통과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박재근 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는 “이른바 ‘K칩스법’을 빠르게 통과시켜주고, 세액공제를 통해 기업들이 어려워진 수출 환경에도 글로벌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K칩스법은 반도체·2차전지·디스플레이 등 국가 전략 기술의 설비 투자에 대한 세액공제율을 인상하는 내용의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이다. 정부와 여당은 3일 국회에서 ‘수출 전략 민·당·정 협의회’를 열어 K칩스법의 조속한 통과를 추진하고, 메모리·시스템반도체 분야에 5년간 30조원 규모의 정책금융을 지원하기로 했다. 이날 이창양 산자부 장관은 초격차 기술력 확보를 위한 R&D 지원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대내외 여건이 어려운 만큼 어느 때보다 국회의 협조와 전폭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성일종 국민의힘 정책위의장은 “민·당·정이 협력해 반도체·2차전지 등 주력 산업 기술 개발과 바이오 등의 신 수출 동력 육성을 위해 금융 지원 확대, 현지 인·허가 규제 대응, 해외 활로 개척 등을 적극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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