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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 다쳤으면"…픽픽 쓰러지고 먹토하는 '병약미' 뜨는 이유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tvN '일타 스캔들'의 남자 주인공 최치열(정경호)은 불면증과 섭식장애에 시달리고, 국가대표 출신 여자 주인공 남행선(전도연)에게 물벼락을 맞거나 족구 경기에서 밀리는 등 나약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사진 tvN

tvN '일타 스캔들'의 남자 주인공 최치열(정경호)은 불면증과 섭식장애에 시달리고, 국가대표 출신 여자 주인공 남행선(전도연)에게 물벼락을 맞거나 족구 경기에서 밀리는 등 나약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사진 tvN

널찍한 침대를 두고도 잠들지 못해 비좁은 침낭에서 뒤척거리고, 먹는 것마다 토해내 영양실조에 시달린다. 살짝 밀친 여자 주인공의 손길에 뒤로 나자빠지고, 의자에 앉으려는 일상적인 순간에도 다리에 힘이 풀려 풀썩 주저앉기 일쑤다.

첫 방송 4%(닐슨코리아 전국 기준)로 시작해 14.3%(14회)까지 시청률이 치솟으며 인기를 끌고 있는 tvN 드라마 ‘일타 스캔들’의 남자 주인공 최치열의 초반 모습들이다. 배우 정경호가 연기한 최치열은 자칭·타칭 ‘1조원의 남자’라 불릴 정도로 잘나가는 수학 ‘일타’(1등 스타) 강사지만, 강의실 바깥에서는 불면증과 섭식 장애에 시달리는 병약한 캐릭터다.

‘병으로 인해 몸이 쇠약하다’는 뜻의 ‘병약’과 아름다울 ‘미’(美)가 과연 나란히 놓일 수 있는 단어인가 싶지만, 둘을 합한 ‘병약미’라는 표현은 이미 최치열과 같은 캐릭터를 수식하는 용어로 널리 쓰이고 있다. 병약한데 아름다운, 혹은 병약해서 아름다운 캐릭터들에 대한 대중문화 소비자들의 애정이 탄생시킨 표현이다. ‘일타 스캔들’이 방영될 때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최치열이 하찮게 넘어지거나 창백한 얼굴로 강의하는 장면을 편집한 토막 영상이나 짤방이 올라오며 “최치열 병약미 너무 좋다” “레전드 병약미 남주(남자주인공)” 등의 반응이 쏟아졌다.

드라마 '그해 우리는' 속 최웅(최우식)은 첫사랑을 잊지 못해 불면증에 시달리는 인물이다. 사진 SBS

드라마 '그해 우리는' 속 최웅(최우식)은 첫사랑을 잊지 못해 불면증에 시달리는 인물이다. 사진 SBS

“남주가 다치는 이야기 어디 없나요”…‘병약 남주’ 수요 ↑

최치열이 유독 두각을 드러내긴 했지만, 병약미 있는 남자 캐릭터가 호응을 얻는 흐름은 최근 드라마와 웹툰·웹소설 등의 콘텐트 시장에서 찾아볼 수 있는 뚜렷한 현상이다. 지난해 대본집까지 출간될 정도로 마니아층을 양산한 SBS 드라마 ‘그해 우리는’에서는 열아홉에 만난 첫사랑을 스물아홉이 되도록 잊지 못한 최웅(최우식) 캐릭터가 특유의 유약한 모습으로 사랑받았다. 그는 연인에게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받은 상처를 5년 동안 잊지 못하고 열병을 앓는 인물로 그려졌다.

정경호는 전작들에서부터 꾸준히 처연한 캐릭터를 연기해 ‘병약미 전문 배우’라는 타이틀까지 얻은 경우다. JTBC ‘순정에 반하다’(2015)에서는 까칠한 겉모습 뒤에 심장병을 앓는 아픔을 지닌 강민호를 연기했고, OCN ‘라이프 온 마스’(2018)에서는 1988년과 현재를 오가는 형사 한태주로 분해 수사 과정에서 수시로 기절하고, 이명·환청에 시달리는 새로운 유형의 경찰 캐릭터를 선보였다.

웹툰, 웹소설 중에도 '병약한 남주'를 제목부터 내세우는 작품이 많다. 사진 카카오페이지 캡처

웹툰, 웹소설 중에도 '병약한 남주'를 제목부터 내세우는 작품이 많다. 사진 카카오페이지 캡처

웹툰·웹소설 쪽에서는 카카오페이지에서 누적 1765만 뷰를 기록한 웹소설 ‘병약한 남주를 꼬셔버렸다’처럼 아예 제목부터 병약한 남자 캐릭터를 내세운 경우도 많다. ‘병약남주’를 태그로 걸고 ‘남자 주인공이 아프거나 다치는 웹툰이나 웹소설을 추천해 달라’고 요청하는 온라인 게시글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벽치기’하는 박력남, 더는 매력 없어”

이처럼 일명 ‘병약 남주’가 하나의 인기 코드로 자리 잡은 건, 과거 남자 주인공들이 대개 외모와 재력을 모두 갖춘 ‘백마 탄 왕자’로 그려지거나, 의사·변호사·검사 등 힘 있는 전문직으로 등장해 사명감을 강조하던 것과는 사뭇 달라진 흐름이다.

이런 변화의 배경에는 소위 ‘남자다움’이라 표현되던 전통적인 성역할 고정관념이 흐려진 현실을 반영한다는 분석이다. 황진미 대중문화 평론가는 “과거에는 일명 ‘벽치기’를 하면서 박력 있게 고백하거나 카리스마 넘치는 근육남이 매력적인 남성상으로 인정받았지만, 요즘에는 그렇지 않다”며 “자기 분야에서 기본을 해내기만 한다면, 남자라도 때론 약하고 여자의 보호를 받을 수도 있다는 새로운 연애관이 드라마에도 반영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병약미’는 곧 ‘인간미’라는 단어와 치환해도 무리가 없다. 남녀 가릴 것 없이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떤 결핍이나 상처에 얽매여 괴로워하고 약한 구석을 지닐 수 있다. 그걸 솔직하게 보여주는 남자 캐릭터들이 병약미 있는, 즉 인간미 넘치는 모습으로 관객의 마음에 가닿고, 사랑을 받는 셈이다.

공희정 드라마 평론가는 “그간 남성 중심 서사들은 남자들이 사회나 가정을 위해 엄청난 희생을 하거나 에너지를 쏟는 모습으로 그려졌는데, 사실 그들도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고 상처와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는 걸 요즘 드라마들이 보여주기 시작한 것”이라며 “특히 보조적 역할에 머물던 여성들이 주도하는 서사가 늘어나면서 자연스레 그간 남자들에게도 존재했으나 그다지 조명되지 않았던 면모도 드러나게 됐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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