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모레퍼시픽미술관 기획전
‘조선, 병풍의 나라 2’ 전시
장승업·채용신 등 걸작 51점
조선시대 미술 정수 보여줘

고종의 어진 화사로 잘 알려진 석지(石芝) 채용신(蔡龍臣, 1850-1941)이 1921년에 그린 장생도10폭병풍. 소나무, 학, 사슴 등 장수를 상징하는 다양한 자연물이 어우러진 선경(仙境)을 그려낸 장생도 병풍이다. 사진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아모레퍼시픽미술관이 다음달 30일까지 고미술 기획전 ‘조선 병풍의 나라 2’를 연다. 사진은 전시관 모습. 사진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 1843-1897)의 홍백매도10폭병풍. 굵은 나무줄기를 대담한 구도로 그린 병풍 형식의 매화도. 줄기와 꽃잎을 거침없는 붓놀림으로 화면 가득 그려내 압도감을 준다. 사진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십장생의 도상인 소나무가 화폭의 중앙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고 주변에는 또 다른 장생의 상징물인 학과 사슴이 노닌다(채용신 1921년 作, ‘장생도10폭병풍’). 파도가 출렁이는 광활한 바다 위에 해와 달이 대칭으로 떠 있고, 그 아래 커다란 반도(蟠桃)를 머금은 복숭아나무가 우거져 있다(19세기, ‘일월반도도12폭병풍’).
아모레퍼시픽미술관(APMA)의 고미술 기획전 ‘조선, 병풍의 나라 2’에서 선보인 작품들의 면면이다. 500년 조선 회화의 걸작을 꼽으라 하면 단연코 병풍이다. 지금은 보기가 힘들어졌지만, 십수 년 전만 해도 집안에 행사가 있는 날이면 펼쳐 쓰는 병풍이 있는 집이 흔했다. ‘병풍의 나라’로 불렸던 조선의 찬란한 유산들을 한 곳에서 만날 수 있는 공간이 5년 만에 서울 한복판에 다시 꾸려졌다.
이번 전시는 2018년 개최한 ‘조선, 병풍의 나라’ 이후 두 번째 전시다. 첫 전시는 조선을 대표하는 전통 회화 형식인 ‘병풍’ 자체를 조명해 화제를 모았다. 이번엔 조선 시대부터 근대까지 제작된 병풍들의 미술사적인 가치와 의의를 되새기고, 우리 전통 미술의 다양한 미감을 관람객들에게 알리는 게 기획 의도다. 이를 위해 15개 기관과 개인이 소장한 작품 51점을 모아 선보였다.
자유분방한 민간 병풍 vs 품격의 궁중 병풍
첫 번째 감상 포인트는 병풍에 담긴 궁중과 민간의 생활상을 비교해보는 것. 일상의 자유분방하고 개성 넘치는 미감과 스토리를 엿볼 수 있는 ‘민간 병풍’, 왕실의 품격과 궁중 회화의 장엄하고 섬세한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궁중 병풍’으로 주제를 나눴다. 근대 병풍의 경우 별도 전시실에서 만날 수 있다.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새 시대의 도래와 함께 변모한 한국 근대 화단의 일면을 병풍이라는 형식 안에서 관람할 수 있게 구성했다.
그동안 한국 회화사 전시에서 접하기 어려웠던 병풍들과 아모레퍼시픽미술관이 새롭게 수집한 작품들도 꼭 챙겨봐야 할 리스트다. 채용신의 ‘장생도10폭병풍’, 이상범의 ‘귀로10폭병풍’ ‘일월반도도12폭병풍’ 등 다수의 병풍이 새롭게 공개됐다. 보물로 지정된 ‘평양성도8폭병풍’과 부산 유형문화재 ‘곤여전도8폭병풍’ 등 지정문화재도 출품됐다. 아모레퍼시픽미술관의 소장품인 ‘고종임인진연도8폭병풍’과 서울 유형문화재 ‘임인진연도10폭병풍’을 통해 정초·단오 등 주요 절기와 국왕 즉위, 왕세자 책봉 등 국가적인 경사에 거행된 잔치 궁중연향(宮中宴享)의 풍경이 어땠는지도 확인할 수 있다. 꽃과 나무, 사람과 건축물을 디테일하고 생동감 있게 표현한 묘사법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조선 말기의 대표 화가 오원(吾園) 장승업이 거침없는 붓놀림으로 매화나무 두 그루를 열 폭에 가득 그려 넣은 수묵채색화 ‘홍백매도10폭병풍’도 관람객의 이목을 사로잡는다. 사군자 중 하나인 매화는 조선 말기에 큰 인기를 누린 그림 소재로, 굵은 나무줄기를 대담한 구도로 그려낸 병풍 형식의 매화도가 민간에서 유행했다. 열 폭에 무려 86쌍의 동물을 사실적으로 묘사해 마치 조선판 동물도감을 보는 듯한 ‘백수도10폭병풍’엔 원숭이, 사자, 코끼리를 비롯한 이국의 동물과 봉황, 기린, 해태 등 상상의 동물이 등장한다. 병풍의 용도는 특정할 수 없지만, 동아시아에서 즐겨 그렸던 동물들을 보여주는 일종의 화본(畵本) 기능을 한 것으로 추측된다.
APMA 개관 5주년 기념 첫 특별전
병풍에 담긴 스토리가 궁금하다면 미술관 앱 ‘APMA’를 무료로 다운로드하면 된다. 마치 도슨트가 바로 옆에서 설명해주듯 모든 작품의 해설을 오디오로 챙겨 들을 수 있다. 아모레퍼시픽미술관 편지혜 큐레이터는 “병풍 안에는 소설, 고사, 역사, 기록 등 다양한 스토리들이 담겨 있다”며 “그 내용을 들으며 눈앞의 작품을 감상하면 병풍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미술사 분야 전문가 26명이 집필한 전시 도록을 통해서도 전체 출품작의 도판과 해설을 확인할 수 있다. 첫 전시 도록과 대학·기관 연구자들이 새롭게 집필한 글을 포함해 총 43편의 논고를 실었다.
전시뿐 아니라 현대적인 분위기로 꾸민 전시관 자체도 볼거리다. 5m를 훌쩍 넘는 천장 높이가 관람객들에게 탁 트인 개방감을 선사한다. 병풍을 보다 가까이에서 느끼고 감상할 수 있도록 작품과 진열 유리 사이의 간격도 5cm 미만으로 축소했다. 작품과 관람객 사이의 물리적인 거리가 줄어든 덕분에 작품의 섬세함이나 채색, 붓 터치 등 그 안에 담긴 미감을 살펴볼 수 있다.
아모레퍼시픽미술관은 미술품 애호가로 알려진 서경배 아모레퍼시픽그룹 회장의 경영 철학이 스며들어 있는 공간이다. 서 회장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우리는 화장품이 아니라 아름다움의 문화를 전파하는 기업”이라고 강조해왔다. 미술관은 지난 5년간 ‘현대미술 프로젝트 에이피 맵 리뷰’ ‘안드레아 거스키 사진전’ 등 다양한 문화 전시회를 열어 소비자와 소통해왔다. 특히 이번 전시는 개관 5주년을 맞아 진행하는 특별한 전시라 미술관에도 의미가 깊다. 편 큐레이터는 “용산에 새롭게 자리 잡은 미술관의 5주년을 기념해 올해의 첫 전시로 기획했다”며 “조금이나마 우리 전통문화와 미술에 관해 관심을 갖고, 그 안에 담긴 아름다움과 가치에 대해 새롭게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지난 1월 26일 오픈한 이번 전시는 다음 달 30일까지 열린다. 그룹 방탄소년단(BTS)의 리더 RM이 다녀가면서 찾는 이들이 크게 늘고 있다는 게 미술관 측의 설명. 관람 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월요일은 휴관이다. 관람료는 성인 1만5000원, 학생 1만2000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