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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세발나물, 진도 봄동…남도에 퍼지는 달큰한 풋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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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봄을 느끼고 싶다면 남도로 가보자. 아직 꽃이 흐드러지진 않았어도 푸릇푸릇한 들녘에서 봄기운이 피어난다. 사진은 전남 진도군 군내면 봄동밭. 최승표 기자, [중앙포토]

봄을 느끼고 싶다면 남도로 가보자. 아직 꽃이 흐드러지진 않았어도 푸릇푸릇한 들녘에서 봄기운이 피어난다. 사진은 전남 진도군 군내면 봄동밭. 최승표 기자, [중앙포토]

봄은 오는 것이 아니라 드는 것이다. 따사로운 볕이 시나브로 드는 것이고, 푸릇푸릇한 기운에 은근슬쩍 젖어 드는 것이다. 하여 봄은 어떠한 기운이나 기척에 가깝다. 문득 둘러보면 어느새 곁에 와 있어서다.

지난겨울은 혹독했다. 유난히 추웠고 지독히 메말랐다. 겨울이 모질었던 만큼 올봄은 드는 속도가 더뎠다. 2월 하순 봄을 찾아 남도를 헤매고 다녔지만, 예년의 생기는 못 만나고 돌아왔다. 겨울 가뭄에 시달린 봄꽃은 피기 전부터 시들었고, 남도의 들녘은 아직 채도를 끌어 올리지 못했다.

그래도 아쉽지는 않다. 기어이 봄은 우리에게로 들 것을 알고 있어서였다. 이맘때 남도의 들녘을 뒤덮었던 봄까치꽃은 못 봤지만, 들녘을 거닐다 신발 밑창에 붉은 흙을 잔뜩 묻히고 말았다. 겨우내 얼었던 땅이 풀렸다는 뜻이다.

해남 세발나물과 보리싹

해남은 서해와 남해를 모두 낀 고장이지만 의외로 핵심 산업은 농업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전국 기초단체 중에 농지 면적(356.18㎢)이 가장 넓다. 대흥사 동백이나 미황사 매화보다 봄을 빨리 배달하는 건, 배추·대파·마늘 같은 들녘의 농작물이다. 그러나 올겨울 남도는 유달리 추웠다. 1~2월 기온이 예년보다 훨씬 낮았던 탓에 배추 냉해가 심각했다.

독특한 식감과 짭짤한 맛이 매력적인 세발나물. 해남에서 많이 난다.

독특한 식감과 짭짤한 맛이 매력적인 세발나물. 해남에서 많이 난다.

그래도 푸릇푸릇한 기운을 뽐내는 작물이 있었다. 세발나물이다. 전국 생산량의 60%가 해남산이란다. 간척지인 문내면 예락마을에서 17개 농가가 세발나물을 재배한다. 비닐하우스로 들어가 봤더니 축구장 잔디와 다를 바 없었다. 이게 나물이라고? 몇 가닥 뽑아서 씹어봤다. 톡톡 씹히는 식감이 독특했고 짭짤한 맛이 났다. 세발나물연구회 김경식(67) 회장은 “소금을 좋아하는 염생식물이라 갯벌이나 간척지에서 잘 자란다”며 “겨울 채소가 없던 시절부터 먹던 나물”이라고 말했다.

세발나물은 아는 사람만 아는 별미다. 살짝 데쳐서 된장에 버무리기도 하고, 파무침처럼 만들어 고기 먹을 때 곁들이기도 한다. 샐러드나 부침개로도 제격이다. 10월부터 5월까지 재배하는데 요즘 나오는 세발나물이 가장 맛이 좋단다.

초겨울에 파종한 보리도 싹을 틔웠다. 새싹 길이가 약 10㎝쯤 자라 보리밭마다 파릇파릇했다. 황산면 연호마을이 보리로 유명하다. 너른 보리밭과 바위 섬 ‘연기도’가 어우러진 풍광이 이채로웠다. 코로나 탓에 2년을 쉬었던 보리축제도 오는 5월에 재개할 예정이다. 올해는 마을 주민이 운영하는 양조장에서 만든 맥주도 선보일 계획이라고 한다.

호남 지역에서는 이맘때 딴 연한 보리 순과 홍어 애(간)를 함께 끓인 ‘홍어앳국’을 즐겨 먹는다. 최승표 기자, [중앙포토]

호남 지역에서는 이맘때 딴 연한 보리 순과 홍어 애(간)를 함께 끓인 ‘홍어앳국’을 즐겨 먹는다. 최승표 기자, [중앙포토]

이맘때 나온 보리 싹은 나물이나 국거리로 먹을 수 있다. 보리 싹 분말은 다이어트 식품으로도 인기다. 보리 순 요리로 ‘홍어앳국’을 빼놓을 수 없다. ‘애’는 생선 간으로, 홍어를 삭히기 전에 떼어내 국으로 끓여 먹는다. 해남읍 ‘일가식당’에서 애국을 맛봤다. 처음엔 톡 쏘는 향이 치고 들어왔지만, 곧 버터처럼 기름진 애의 맛과 보리 순과 된장의 구수함이 묘하게 어우러졌다.

진도 봄동과 쑥

진도 여행 일번지, 운림산방. 산책하기 좋다. 손민호·최승표 기자

진도 여행 일번지, 운림산방. 산책하기 좋다. 손민호·최승표 기자

진도에 들어가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운림산방’이었다. 조선 화가 허련(1808~93)이 낙향해 지낸 곳인데 정원이 아름답기로 소문났다. 연못에 비친 첨찰산이 멋졌고 동백꽃도 조금 피었지만, 아직은 봄보다 건조한 겨울 느낌에 가까웠다.

도리어 군내면 봄동밭에서 눈부신 초록을 마주했다. 금골산 비탈면에서 수확 작업이 한창이었다. 할머니들이 여문 봄동을 칼로 도려내고 시든 이파리를 제거하면, 장정들이 박스에 채워서 트럭에 실었다. 따스한 봄 공기에 봄동의 달큰한 풋내가 섞여서 코를 간지럽혔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진도에서는 지난해 183개 농가가 봄동 4300톤을 수확했다. 전국 생산량의 38%나 된다. 봄동은 이름처럼 봄에 먹는 배추다. 요즘은 수확 시기가 빨라졌다. 9월께 보리 수확이 끝난 밭에 파종해 12월부터 수확한다. 서점례(76)씨는 “추운 겨울을 버텨낸 요즘 봄동이 가장 맛있고 영양도 좋다”며 “하우스에서 키운 봄동은 맛이 밍밍하다”고 말했다.

요즘에는 진도의 어느 식당을 들어가도 봄동이 반찬으로 나온다. 유명 식당에서 간장게장과 듬북탕(해초 ‘듬북’을 넣은 갈비탕)을 먹었는데 주요리보다 봄동나물이나 마늘대무침, 톳나물 같은 제철 밑반찬이 반가웠다. 이맘때 남도 여행에서 누릴 수 있는 호사다.

하조도에서 쑥을 수확 중인 농민이 환하게 웃는 모습. 손민호·최승표 기자

하조도에서 쑥을 수확 중인 농민이 환하게 웃는 모습. 손민호·최승표 기자

진도는 쑥 생산량도 전국 최대다. 부속 섬 ‘조도’가 쑥의 본고장이다. 178개 섬으로 이뤄진 조도면에서도 가장 큰 섬인 상조도와 하조도에 쑥밭이 많다. 진도군에 따르면, 전국 쑥의 약 35%가 조도 산이란다.

진도 조도 쑥. 조도는 다도해 해상 국립공원에 속한 청정 섬이다

진도 조도 쑥. 조도는 다도해 해상 국립공원에 속한 청정 섬이다

진도항에서 배를 타고 다도해 해상 국립공원에 속한 하조도에 들어갔다. 푸른 바다처럼 파란색 부직포를 덮어둔 자리가 모두 쑥밭이었다. 봄동밭에 비하면 쑥밭은 한결 여유로운 풍경이었다. 윤슬 반짝이는 바닷가에서 삼삼오오 쑥을 뜯는 섬사람들에서 나른한 봄기운이 전해졌다. 쑥 뜯는 일이 고될 텐데도 농민들 얼굴은 하나같이 해사했다. 안정숙(70)씨의 쑥 자랑을 전한다. “쑥은 6월까지도 캐는디 지금 쑥이 순하고 향이 좋아서 국으로 먹기에 제격이어라. 조도는 공기가 깨끗하고 약도 일절 안 치니께 이거야말로 무공해 쑥이지라.”

강진 백련사 동백

몇 해 전 3월 초순에 촬영한 백련사 동백꽃. 올해 융단처럼 깔린 동백을 보려면 좀 더 기다려야 한다. 최승표 기자, [중앙포토]

몇 해 전 3월 초순에 촬영한 백련사 동백꽃. 올해 융단처럼 깔린 동백을 보려면 좀 더 기다려야 한다. 최승표 기자, [중앙포토]

봄이 들 무렵에는 강진을 꼭 들른다. 이맘때면 생각나는 길이 있어서다. 다산초당에서 백련사로 이어진 2㎞ 남짓한 오솔길. 이른바 ‘초당 가는 길’이다.

강진에 유배 온 다산 정약용(1762~1836)이 만덕산(408m) 자락 초당에 들어간 건 1808년 봄이었다. 1818년 해배돼 경기도 남양주 고향 집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다산은 초당에서 약 10년을 살았다.

초당에 머물던 시절 다산은 만덕산 옆 자락의 백련사를 수시로 드나들었다. 천년고찰 백련사에 다산과 막역한 우정을 나눈 혜장 선사(1772~1811)가 있어서였다. 두 사람은 무던히도 이 길을 걸으며 친분을 쌓았다. 다산이 한밤에 횃불 앞세우고 걸었다는 기록도 전해온다. 선비와 승려가 오간 길이었으니, 유교와 불교가 조우한 길이었다.

강진 다산초당. 유배 온 정약용이 10년을 살았다. 손민호·최승표 기자

강진 다산초당. 유배 온 정약용이 10년을 살았다. 손민호·최승표 기자

다산과 혜장 사이에는 차(茶)가 있었다. 다산초당과 백련사를 거느린 만덕산은 야생 차가 많아 예부터 다산(茶山)이라 불렸는데, 백련사 후미에도 너른 차밭이 있다. 2월 하순 백련사 차밭은 아직 푸르지 않았다.

백련사 차밭을 지나면 국내 최대 규모의 동백나무 숲이 있다. 1962년 천연기념물 제151호로 지정된 동백 숲이다. 팔도에 동백 숲이 흔하지만, 천연기념물로 보호하는 동백 숲은 많지 않다. 면적이 약 5만2000㎡로, 수령 100년이 넘는 동백나무만 1500여 그루가 있다. 백련사 동백나무는 유난히 못생겼다. 번듯한 나무보다는 비틀린 나무가 많고, 흉터 같은 옹이를 진 나무도 많다. 상처투성이 동백나무 사이에서 한참을 서성거렸다.

백련사 동백 숲은 붉지 않았다. 예년에는 뚝 떨어진 꽃송이로 땅바닥이 온통 붉었는데, 채 피기도 전에 바닥을 뒹구는 봉오리가 많았다. 아직 계절이 이르기도 했거니와 겨울 가뭄이 모질었다.

강진 백련사 경내에 핀 수선화. 몽우리를 터뜨린 홍매화도 볼 수 있다. 손민호·최승표 기자

강진 백련사 경내에 핀 수선화. 몽우리를 터뜨린 홍매화도 볼 수 있다. 손민호·최승표 기자

백련사 경내에서 막 봉우리를 터뜨린 홍매화와 수선화 몇 송이를 겨우 발견했다. 보름만 버티면 동백 숲은 붉게 물들 터이고 다시 보름을 버티면 차밭이 푸를 터였다. 그래, 봄은 기다리는 것이다. 200년쯤 전 강진에서 혹독한 겨울을 보냈던 선비도 그렇게 기다려 마침내 봄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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