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세컷칼럼

위기 때마다 은행이 문제였다

중앙일보

입력

고현곤 기자 중앙일보 편집인

1997년 외환위기 과정을 요약하면 이렇다. 기업이 빚을 내 사업을 무리하게 확장했다. 은행과 종합금융회사가 국제금융시장에서 외화(주로 일본자금)를 빌려 그 돈을 댔다. 금융의 기본을 잊은 채 단기로 차입해 장기로 빌려줬다. 그러다 아시아 신흥국 대외신인도에 문제가 생겼다. 만기 미스매치가 사태를 키웠다. 외화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면서 국가부도 사태를 맞았다. 당시 국내 금융회사가 차입한 외화가 718억 달러. 외채 파티였다. 외화 물꼬를 터주고, 감독에 소홀했던 정부에 1차 책임이 있다. 빚으로 과잉 투자한 기업, 달러가 넘치자 과소비에 나선 국민도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하지만 외환위기의 근원을 꼽으라면 외채로 이자 장사에 몰두한 은행이었다. 흔히 종금사를 외환위기의 주범으로 여기지만 은행이 빌린 외화가 훨씬 많았다.

외환위기 여파로 은행은 인수·합병을 거쳐 재편됐다. 이름만 바뀌었을 뿐 체질은 나아지지 않았다. 세금으로 조성한 공적자금 160조원을 긴급 수혈받았다. 고비를 넘기자 도덕적 해이가 고개를 들었다. 임직원에게 무이자 대출을 해주고, 3년간 임원 보수를 두 배로 올렸다가 감사원에 적발됐다. ‘공적자금은 먼저 보는 게 임자’라는 말이 나왔다. 외채 파티에 이은 공적자금 파티였다. 급할 때 정부에 손 벌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흥청망청 쓰고, 대출금리는 다락같이 올리고…. 정부는 당황했다. 국민은 배신감을 느꼈다.

외채로 이자 장사…외환위기 초래
금융위기 때 지원받고 돈 안 풀어
좋을 때 쉽게 벌고, 급하면 손 벌려
정부 개입 반발 전에 자신 돌아봐야

2008년 금융위기 때 은행은 다시 국민을 배신했다. 어설픈 실력이 바로 드러났다. 입만 열면 초일류 은행, 메가뱅크를 외쳤지만 허울 좋은 신기루였다. 덩치만 커졌을 뿐 이자 장사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했다. 정작 필요할 때 달러 한 푼을 구하지 못했다. 급기야 외화차입금을 갚아야 한다며 한국은행에 손을 벌렸다. 정부에는 해외차입 지급보증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위기 때마다 하던 대로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급보증을 승인하면서 “은행이 고임금을 유지하면서 정부 지원을 받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고 질책했다. 대통령 한마디에 놀란 은행들은 부랴부랴 보수를 삭감했다. ‘위기 극복에 적극 동참하겠다’는 결의문을 발표하는 등 한바탕 쇼를 했다.

그때뿐이었다. 위기를 모면하자 은행 태도가 달라졌다. 혼자 살겠다며 돈을 움켜쥐고 시중에 풀지 않았다. 정부가 압박해도 소용없었다. 2009년 내내 기업은 돈이 마르고, 가계대출 금리는 치솟는 자금 경색이 이어졌다. “은행은 위기 상황에서도 도덕적 해이에 빠져 있었다.”(이명박 『대통령의 시간』) 얼마 뒤 KB국민과 신한은행 경영자들은 볼썽사나운 경영권 내분까지 벌였다.

지난해 40년 만의 인플레이션에 이은 고금리가 닥치자 은행이 또 국민을 배신했다. 만만한 취약계층·소상공인을 상대로 이자 장사에 나섰다. 지난해 4대 은행(KB·신한·하나·우리) 이자 이익만 39조원을 넘었다. 경영을 갑자기 잘한 게 아니다. 순전히 고금리 때문에 떼돈을 벌었다. ‘횡재세’라도 거둬야 할 판이다. 영업이익 중 95% 안팎을 이자 장사로 채웠다. 선진국 은행은 60%대에 그친다. 지난해 예대금리 차가 2.21%포인트에서 2.55%포인트로 확대됐다. 금리 상승기에 예대금리 차가 커진다는 말은 핑계다. 대출받을 때 대번에 느끼는 것이지만, 은행은 갑이다. 마음만 먹으면 대출 가산금리를 낮춰서 예대금리 차를 얼마든지 줄일 수 있다. 이를 외면하고 더 받아낸 이자로 1조원 넘는 성과급 파티를 벌였다. 배짱이 좋은 건지, 타성에 젖은 건지, 눈치가 없는 건지….

윤석열 대통령이 “은행은 공공재 성격이 강하다”고 경고하자 사회공헌을 3년간 10조원으로 늘리겠다며 부산을 떨었다. 알고 보니 실제 지원은 2800억원만 늘린 ‘뻥튀기’ 발표였다. 대출금리를 내리는 시늉을 하면서 예금금리는 더 많이 떨어뜨렸다. 눈가림으로 소나기만 피하자는 식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은행 안팎에선 대통령 발언에 불만을 쏟아낸다. ‘민간 기업의 자율성을 해친다. 시장경제 원리에 어긋난다. 공공재 개념도 모르고 한 소리다.’ 관치는 바람직하지 않다. 하지만 은행이 자율과 시장경제를 내세우기에는 정부에 손을 너무 자주 벌렸다. 민망할 정도로. 공공재냐, 아니냐 논쟁할 만큼 한가하지도 않다. 한 은행 관계자는 “사기업인 은행에 공익 지출을 강요해 체력이 떨어지면 위기 때 제 역할을 못 한다”고 말했다. 언제 은행이 그런 역할을 한 적이 있었나. 은행은 위기 때마다 버팀목이 아니었다. 시장 지배력에 안주하는 기득권이었다.

위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실물경제 침체가 깊어지면 은행도 부실이 쌓인다. 어려워지면 정부에 또 손을 벌릴 것이다. 고비를 넘기면 다시 이자 장사와 그들만의 성과급 파티를 할 것이다. 좋을 때는 민간 기업이라며 자기 호주머니 챙기다가, 나빠지면 공익성을 앞세워 정부에 지원을 요청하는 후진적 경영 행태다. 기업은 세계 1위가 나오는데 은행은 세계 바닥권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은행들 주장처럼 정부 개입과 규제가 없었으면 지금보다 나은 모습을 보였을까. 의문 또 하나. 은행이 곤경에 처하면 정부가 지원해야 하나. 은행은 국민을 돕지 않는데, 국민은 은행을 도와야 하나.

글=고현곤 편집인  그림=김아영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