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이트 블란쳇. 지난달 23일 베를린 국제영화제 참석 중 환히 웃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반지의 제왕'의 요정 여왕 갈라드리엘 역부터 까칠한 천재 과학자('어디갔어 버나뎃'), 고독한 여왕('엘리자베스)까지, 배우 케이트 블란쳇의 연기 스펙트럼이 넓다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다. 그런 그가 연기의 정점을 찍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영화 '타르' 얘기다. 미국 뉴요커는 최근호에서 "케이트 블란쳇이 케이트 블란쳇을 연기했다"는 제목으로 그를 인터뷰했다. 그는 이 역할로 지난달 20일 영국아카데미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품에 안았다. 13일 열릴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여우주연상 유력 후보다.
블란쳇이 연기한 인물은 리디아 타르.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첫 여성 지휘자로 성공을 향한 열망에 스스로를 불사르다 삶의 균형을 잃으며 분투하는 인물이다. 예술 등 많은 분야에서 남녀 평등은 미완의 과제다. '여류 소설가'라는 말은 흔하지만 '남류 소설가'라는 말이 귀에 설고, 지휘자라고 하면 바로 턱시도 입은 남성이 떠오른다. 영화에서 리디아 타르는 실존인물처럼 그려지지만, 아직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여성 지휘자는 없다. 블란쳇이 영화 전문 매체 버라이어티와의 최근 인터뷰에서 "권력에 관한 영화"라고 풀이한 이유다.
아카데미 시상식을 앞두고 블란쳇의 인터뷰는 여러 매체에서 쏟아지고 있다. 그러나 뉴요커의 인터뷰가 특별한 이유가 있으니, 영화에서도 실명으로 출연해 블란쳇이 연기한 타르를 인터뷰하는 역을 맡은 애덤 갑니크 기자가 직접 인터뷰어로 나섰다. 갑니크 기자는 "글쓰는 일이 아니라 연기를 한다니 망설였지만 상대 배우가 블란쳇이라니, 안 나갈 수가 있나"라는 요지로 기사를 시작했다.

블란쳇이 '타르'에서 연기한 여성 지휘자. AP=연합뉴스
블란쳇은 뉴요커에 영화 출연 결심에 대해 "멘토가 없는 여성이 홀로 성공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라서 끌렸다"며 "결국 스스로가 스스로의 멘토가 되어 음악이라는 존재에 모든 것을 바친 존재를 연기하는 것은 쉽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호주 출신으로 1969년생인 블란쳇은 연극 무대에서 경험을 쌓은 뒤 할리우드에 진출했다. 뉴요커는 그에 대해 다양한 작품에서 항상 확실한 본인만의 캐릭터를 선보이는 내공이 깊다고 호평했다.
블란쳇은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수상소감에서 "올해는 여성(영화인들)에게 환상적인 해였다"며 외려 다른 후보들을 돋보이게 했다. 그와 미국 아카데미 트로피를 놓고 뜨거운 경쟁을 벌이는 인물은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엣 원스'의 미셸 여. 뉴욕타임스(NYT)는 두 배우 간의 연기가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라며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의 여우주연상은 '배틀 로얄'이라는 표현까지 썼다.

블란쳇은 다양한 연기 스펙트럼으로 전세계 영화계를 사로잡아왔다. AP=연합뉴스
블란쳇과 미셸 여 배우는 그러나 서로를 진심으로 격려하는 우정의 모습을 보여 박수를 받고 있다. 버라이어티 최근호 공동 인터뷰가 대표적이다. 블란쳇이 "미셸과 함께 인터뷰를 하다니 너무 떨렸다"고 말문을 열자 미셸 여는 "나는 긴장한 정도가 아니라 잠을 못 잤다"며 웃었다고. 둘은 버라이어티에 "내가 맡은 역할은 사실 남성 배우를 염두에 두고 쓰였다"(미셸 여) "만약 남성 지휘자 스토리였다면 새로울 게 없는 영화였을 것"(블란쳇)이라고 말했다. 다가오는 13일, 둘 중 누가 트로피의 주인이 되든, 블란쳇과 미셸 여는 서로의 최고의 응원자가 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