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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서 1시간 학교에 배정" 새 학기마다 반복되는 딜레마

중앙일보

입력

지난달 9일 오후 강원 춘천시 강원도교육청에서 열린 2023학년도 강원도교육감입학전형(평준화) 고등학교 신입생 추첨 배정에서 학부모 위원이 1단계 배정을 진행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달 9일 오후 강원 춘천시 강원도교육청에서 열린 2023학년도 강원도교육감입학전형(평준화) 고등학교 신입생 추첨 배정에서 학부모 위원이 1단계 배정을 진행하고 있다. 연합뉴스

“16지망 학교에 배정될 줄은 상상도 못 했죠.”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에 사는 학부모 A씨(47)는 최근 부동산에서 집을 알아보고 있다. 올해 고등학생이 된 딸이 집에서 3.5㎞ 떨어진 학교에 다니게 돼서다. 걸어서 한 시간, 버스를 타면 30분이 걸리는 거리다. 선호하는 1, 2지망 고교는 추첨에서 떨어졌고 결국 16지망이었던 학교에 배정된 것이다. A씨는 “집 근처에 걸어서 20분이면 갈 수 있는 학교 3곳은 추첨에서 모두 떨어졌다. 대학 입시에 집중해야 할 시기에 등교하면서 체력을 소모할 수 없어 이사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고 토로했다.

학교까지 1시간…1%의 ‘불운한’ 학생들

지난해 3월 11일 오전 서울 한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이 등교를 하고 있는 모습. 뉴스1

지난해 3월 11일 오전 서울 한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이 등교를 하고 있는 모습. 뉴스1

새 학기를 앞두고 거리가 먼 학교로 자녀를 등교시켜야 하는 학부모들의 불만이 커지고 있다. 사립초나 특목고처럼 특정 학교를 선택하는 경우도 있지만, 추첨에 의해 배정되는 학교에 가는 학생들은 순전히 ‘운’에 따라 원거리 통학을 해야만 하는 사례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올해 경기도에선 A씨의 딸처럼 가장 마지막 지망 순위의 학교에 배정된 고등학생이 751명이다. 경기도의 고교 신입생 5만8632명 중 82.7%의 학생이 1지망에 배정이 됐지만, 1.28%에 해당하는 이른바 ‘운이 나쁜’ 학생들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집에서 거리가 멀거나 가장 가고 싶지 않은 학교에 가게 된 셈이다.

이는 고교평준화 지역의 일반 인문계고가 추첨 방식을 통해 학교를 배정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학생들은 자신이 속한 학군 내에 있는 고등학교의 지망 순위를 제출하고, 시·도교육청은 이를 바탕으로 전산 추첨 등을 진행한다. 1지망에 떨어진 학생들을 모아 2지망을 다시 추첨하고 모두 배정이 완료될 때까지 이를 반복하는 식이다.

경기도처럼 한 학군의 면적이 넓거나 세종특별자치시처럼 시 전체가 동일 학군인 경우에는 학군 내 추첨이라도 원거리 학교에 배정될 수 있다. 세종시교육청 관계자는 “대부분의 학생이 1지망 학교에 배정됐지만, 추첨에 밀려 지망에 아예 적지 않은 학교로 배정된 학생도 52명이 나왔다”며 “동일 학군이다 보니 집에서 학교까지의 거리가 6~7㎞가 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교육청 “추첨 방식은 선택권 존중 위해 불가피”

이러한 추첨 방식에 일부 학생과 학부모들 사이에선 불만이 크지만, 선택권 측면에서 불가피하다는 게 교육 당국의 입장이다. 경기도교육청 관계자는 “끝지망에 배정된 학생들이 모두 원거리 통학을 하는 건 아니다”라며 “모든 학생과 학부모가 근거리 학교를 선호하는 게 아니고, 학교 분위기나 대학 진학률 등 여러 요소를 고려하기 때문에 이러한 선택권을 존중하기 위해 지망에 따른 추첨이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원거리 배정의 문제가 매년 반복되는 만큼 추첨 방식을 보완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국토교통부 시행 규칙에 따라 통학 거리를 1.5㎞ 이내로 정해야 하는 초등학교처럼 중·고교도 최대 통학 거리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통편의 제공도 대안으로 제시된다. 경남 거제시는 통학 민원을 해결하기 위해 2일부터 학교를 오가는 시내버스 노선을 새로 운행한다. 거제교육지원청 관계자는 “추첨 결과를 번복할 수는 없기 때문에 거제시와 협의해 시내버스 직행 노선이 없는 학교에 배정이 된 학생들을 위해 교통편의를 제공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통학로에 왕복 10차선…등굣길 안전 문제도

어린이보호구역(스쿨존)에서 음주 운전 차량에 치어 초등학생이 숨진 가운데 지난해 12월 13일 서울 강남구 언북초등하교 인근에 스쿨존을 알림판이 보이고 있다. 뉴스1

어린이보호구역(스쿨존)에서 음주 운전 차량에 치어 초등학생이 숨진 가운데 지난해 12월 13일 서울 강남구 언북초등하교 인근에 스쿨존을 알림판이 보이고 있다. 뉴스1

초등학교의 경우는 근거리 배정은 되지만, 통학로 안전이 문제다. 경기도 안양시의 한 아파트 단지와 B초교 사이 통학로에는 왕복 10차선의 도로가 있다. 등교를 위해선 육교나 횡단보도를 건너 30분 이상 걸어가야 한다. 올해 B초교에 자녀가 입학한 김재봉(37)씨는 “아이와 함께 등굣길을 걸어보니 아이가 왕복 10차선을 가로지르는 육교나 횡단보도를 건너는 걸 무서워해 혼자 등교는 무리라는 판단이 들었다”고 말했다. 결국 김씨는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는 B초교 학부모들과 함께 통학버스 업체와 계약을 맺어 매월 3만5000원씩 내고 아이를 통학버스로 등교시키기로 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정부는 지난달부터 통학로 안전 점검에 나섰다. 우선 통학로에 보도가 없는 학교를 중심으로 담장이나 축대를 안쪽으로 옮겨 공간을 마련하거나 학교 인근 도로를 일방통행으로 지정해 보도를 신설할 예정이다. 통학로에 사고가 자주 발생하는 곳은 상·하반기 개학을 앞두고 정부 부처 합동으로 안전진단을 실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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