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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현기의 시시각각

4번타자 vs 8번타자 리더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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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현기 기자 중앙일보 도쿄 총국장 兼 순회특파원

'내가 주인공'과 '네가 주인공' 조화
정상 간은 통했지만 외교 수순 꼬여
콜드게임, 보이콧, 버티기 기로에

김현기 순회특파원 겸 도쿄총국장

김현기 순회특파원 겸 도쿄총국장

#1 지난해 4월 당선자 신분이던 윤석열 대통령이 정진석 특사단장 등 일본에 파견했던 특사단 일행과 저녁모임을 가졌다. 일종의 보고회였다.

소폭이 오갔다. 화제는 소주 브랜드로 번졌다.

윤 대통령은 통혁당 간첩사건 장기수인 신영복의 필체로 쓰인 롯데 브랜드 '처음처럼'을 가리켜 "난 그런 거 안 마신다"고 했다고 한다.

이는 당시 자리했던 참석자들에게 강하게 각인됐다. 구전으로 여기저기 퍼졌다.

얼마 전 윤 대통령이 UAE와 다보스포럼에 갔을 때도 그 얘기가 대기업 총수 사이에 화제가 됐다.

한 고위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어디서든 거침없이 다 해 늘 깜짝 놀란다"고 전했다.

실제 윤 대통령은 자기 생각을 그냥 직구로 던진다. '건폭'이란 신조어까지 만들었다.

자리와 대화를 주도한다. '내가 주인공!' 스타일이다.

윤 대통령을 잘 아는 지인은 "야구에 비유하면 그는 투수 겸 4번 타자 겸 감독"이라고 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5월 26일 정부세종청사에서 국정운영실 직원으로부터 국정운영 홈런을 기원하는 메시지가 적힌 야구 방망이를 선물받은 뒤 휘두르고 있다(왼쪽).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외상 시절 고향인 히로시마 연고의 히로시마 카프 팀 경기에서 시구를 하는 모습(오른쪽). 사진 대통령실, AP=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5월 26일 정부세종청사에서 국정운영실 직원으로부터 국정운영 홈런을 기원하는 메시지가 적힌 야구 방망이를 선물받은 뒤 휘두르고 있다(왼쪽).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외상 시절 고향인 히로시마 연고의 히로시마 카프 팀 경기에서 시구를 하는 모습(오른쪽). 사진 대통령실, AP=연합뉴스

#2 일본의 기시다 총리는 정반대에 가깝다. 장점을 '듣는 힘'이라 스스로 자랑한다.

윤 대통령 못지않은 주당이지만 술이 많이 들어가도 주로 상대방 이야기를 듣는 데 집중한다. '네가 주인공!' 스타일이다.

자민당 세코 참의원 간사장은 그런 기시다 총리를 가리켜 "2루수에 8번 타자"라고 말한다.

화려한 주목을 받진 않지만 팀워크를 중시하며 묵묵히 자기 역할만 하는 스타일이란 얘기다.

실제 기시다는 고교 시절 야구부에서 2루수에 8번 타자였다. 당시 동료 세키네 상공조합 중앙금고 대표는 "성실하게 연습만 했던 친구였다. 꾀부리거나 적당히 하는 걸 본 적이 없다"고 털어놓는다.

고교 2학년 도쿄도 하계대회에 출전한 기시다는 중요한 시합에서 평범한 땅볼을 가랑이 사이로 빠뜨리는 결정적 실책으로 팀을 패배하게 했다.

하지만 기시다를 탓하는 동료는 단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모두 열렬한 야구팬이다. 기시다 총리는 고교까지 2루수로 야구부 활동을 했다. 왼쪽은 윤 대통령이 대통령후보 시절인 2021년 9월 모교인 충암고를 방문해 유니폼을 입고 공을 던지는 모습. 오른쪽은 기시다 총리가 지난 2020년 자민당 정조회장 시절 스포츠지와의 인터뷰에서 고향 히로시마 카프의 유니폼을 입고 방망이를 휘두르고 있는 모습. 뉴스1, 기시다 인스타그램 캡처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모두 열렬한 야구팬이다. 기시다 총리는 고교까지 2루수로 야구부 활동을 했다. 왼쪽은 윤 대통령이 대통령후보 시절인 2021년 9월 모교인 충암고를 방문해 유니폼을 입고 공을 던지는 모습. 오른쪽은 기시다 총리가 지난 2020년 자민당 정조회장 시절 스포츠지와의 인터뷰에서 고향 히로시마 카프의 유니폼을 입고 방망이를 휘두르고 있는 모습. 뉴스1, 기시다 인스타그램 캡처

#3 사실 윤 대통령의 '말하는 힘'과 기시다 총리의 '듣는 힘'의 조화를 기대했다.

실제 여러 다자회의에서 두 정상이 만나면 서로 케미가 잘 맞는다고 한다.

어제 3·1절 기념사에서 일본을 "침략자에서 협력 파트너로 변했다"고 규정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 극과 극은 통하는 법이다.

강제징용자 문제도 그랬을 수 있다. 그런데 외교적 수순이 꼬였다. 외교 당국 간 협상이 일본 페이스로 넘어가버렸다.

협상장을 한 번 박차고 나오더라도 균형을 잡는 노력을 해야 했다. 한데 질질 끌려가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우리가 일본에 상응 조치를 '부탁'하는 처지가 됐다.

그러다 보니 지난달 18일 박진 외교부 장관의 "일본의 정치적 결단이 필요하다"는 말 한마디에 일 총리 관저는 가소롭다는 듯 발끈한다.

박진 외교부 장관(오른쪽)과 하야시 요시마사 일본 외상이 지난달 18일(현지시간) 독일 뮌헨안보회의가 열리는 바이어리셔 호프 호텔에서 한일 외교부 장관 회담을 하고 있다. 사진 외교부

박진 외교부 장관(오른쪽)과 하야시 요시마사 일본 외상이 지난달 18일(현지시간) 독일 뮌헨안보회의가 열리는 바이어리셔 호프 호텔에서 한일 외교부 장관 회담을 하고 있다. 사진 외교부

'상응 조치'로 고작 김대중-오부치 선언 계승을 내놓으면서 마치 엄청난 시혜를 베푸는 듯 생색낸다.

마음 같아선 윤 대통령이 강속구를 던지건, 변화구를 구사하건, 술로 대결하건 기시다 총리와 세게 최종 담판을 지으면 좋겠다.

그리고 안 되면 '협상 결렬'을 선언했으면 좋겠다. "끝까지 노력해 봤으나 더 이상의 논의는 필요없겠다. 더는 이 문제로 일본에 손을 벌리지 않고 대한민국이 대한민국 정부 돈으로 피해자들에게 배상하겠다"고 말이다.

야당도 반대할 명분이 없고, 향후 대일 외교에서도 도덕적 우위에 설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일 정부가 그런 자리를 아예 안 만들어준다는 현실적 한계다.

"먼저 만족할 만한 최종안을 내놓아야만 셔틀 정상회담 자체가 가능하다"는 게 일본 입장이다.

소식통에 따르면 "잘 절충만 되면 이달 중이라도 기시다 총리가 방한할 수 있다"고 한다.

윤석열 대통령이 1일 서울 중구 유관순 기념관에서 열린 제104주년 3.1절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이 1일 서울 중구 유관순 기념관에서 열린 제104주년 3.1절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 어쩌다 보니 기울어져 버린 야구장, 너덜너덜해진 체력고갈 상황에서 한·일전의 남은 선택지는 세 가지.

① 굴욕의 콜드게임 패란 비난을 받더라도 빨리 마무리하고 다음 시합에 임한다. ② 시합을 보이콧한다. ③ 포기하지 않고 무조건 버틴다.

선택과 책임은 오롯이 '투수 겸 4번 타자 겸 감독'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