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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조가 있는 아침

(165) 부모님 계신 제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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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유자효 한국시인협회장

유자효 한국시인협회장

부모님 계신 제는
이숙량(1519∼1592)

부모님 계신 제는 부모인 줄을 모르더니
부모님 여읜 후에 부모인 줄 아노라
이제사 이 마음 가지고 어디다가 베푸리오
-분천강호록(汾川講好錄)

적선지가(積善之家) 필유여경(必有餘慶)

참으로 그러하다. 나를 낳아 길러주신 부모님께 내가 한 짓들이 부모님 가신 후에 이렇게 새록새록 살아날 줄 몰랐다. 아, 이제 철이 좀 든듯한데 부모님 이미 계시지 않으니 이 마음을 어디다 갚을 수 있단 말인가.

이 시조는 ‘어부사’로 유명한 조선 중기의 문신 농암 이현보의 여섯째 아들 매암(梅巖) 이숙량(李叔樑)이 가문의 법도를 세우기 위해 쓴 『분천강호록』에 수록돼 있다. ‘분천’은 영천 이씨의 집성촌이며 ‘강호’는 서로 화목하여 사이좋게 지낸다는 뜻이다.

퇴계의 제자 가운데 문필이 뛰어난 세 사람 가운데 하나였던 이숙량이 선조때 왕자의 교육을 맡는 사부(師傅)에 임명돼 입궐하자 왕은 즉석에서 ‘적선지가 필유여경’을 써서 주었다. “좋은 일을 많이 한 집안은 후대까지 그 복이 미친다”는 뜻이다.

이숙량은 임진왜란이 터지자 격문을 돌려 의병의 궐기를 촉구해 영남우도 방어에 크게 기여했다. 임란 3대첩 가운데 하나인 진주성 싸움에서 순국했으니, 그에 있어 충(忠)은 효(孝)와 다르지 않았고 효는 충과 다르지 않았다.

유자효 한국시인협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