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금메달 따고도 맺힌 응어리, 35년 만에 씻었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8면

지난달 24일 만난 영화 ‘카운트’ 권혁재 감독(위)과 주인공의 실제 모델 박시헌 복싱감독.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지난달 24일 만난 영화 ‘카운트’ 권혁재 감독(위)과 주인공의 실제 모델 박시헌 복싱감독.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어떤 하루는 한 사람의 평생을 좌우한다. 23살의 유망 복싱선수 박시헌에겐 1988년 10월 2일이 그런 하루였다. 조국에서 열린 올림픽 마지막날, 복싱 라이트미들급 결승에 출전해 금메달을 땄지만, 열세였던 경기 내용에 스스로도 어리둥절한 승리였다.

상대방 미국 선수 측은 심판 매수설을 주장하며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재심을 요구했고, 국내 언론마저 ‘억지 금메달’ ‘잘 치른 대회에 오점’ ‘망신스럽다’ 등의 표현을 써가며 비난을 쏟아냈다. 빗발치는 질타 속에 청년 박시헌은 해명 한번 못해본 채 링 위를 떠나야 했다.

“펑펑 울고 싶더라고요. 35년간 가슴에 묻어둔 상처를 영화가 씻어주는 느낌이었습니다.”

영화는 박 감독이 올림픽에서 불명예스러운 금메달을 딴 이후 체육교사로 일하던 시절 이야기를 그렸다. [사진 CJ ENM]

영화는 박 감독이 올림픽에서 불명예스러운 금메달을 딴 이후 체육교사로 일하던 시절 이야기를 그렸다. [사진 CJ ENM]

그날 이후 쌓여온 응어리를 풀어준 건 자신의 삶을 스크린에 옮긴 영화 ‘카운트’다. 지난달 22일 개봉한 ‘카운트’는 88올림픽 이후 10년 뒤, 박시헌이 고향인 경남 진해에서 제자들을 길러내던 시절의 실화를 그렸다. 배우 진선규가  첫 단독 주연을 맡아 그의 캐릭터를 ‘박시헌’이라는 이름 그대로 연기한다.

‘카운트’의 권혁재(43) 감독과 실화의 주인공 박시헌(58) 현 서귀포시청 복싱팀 감독을 지난달 24일 서울 강남구 한 스튜디오에서 만났다. 마찬가지로 영화에 본명이 쓰인 박 감독의 아내 조일선(55)씨까지, 한자리에 모인 이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위안이자 치유가 됐다”는 진심 어린 인사를 건넸다.

전작 ‘해결사’ 이후 13년 만의 복귀작에서 박시헌 선수 실화를 다루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권혁재(이하 권)=“준비하던 영화 두세 편이 무산되는 부침이 있었다. 그러던 2016년쯤 제작사(필름케이) 대표가 건네준 시나리오 중 하나에 88올림픽 복싱 금메달을 둘러싼 이야기가 담겨있었다. 어려움 속에 희망을 찾는 ‘착한’ 이야기라 (흥행이) 걱정됐지만, 내게 큰 위안이 됐으니 영화로 만들면 다른 사람들도 희망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박시헌씨를 직접 만나 봐야겠다는 마음으로 태릉선수촌을 찾아갔다.”(※당시 박 감독은 리우 올림픽 복싱 국가대표 감독이었다)
올림픽 이후 받은 상처가 컸을 것 같다.
박시헌(이하 박)=“‘매국노’라는 손가락질부터 ‘메달을 반납하라’는 야유까지…. 수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들을 쭉 세워놓고 소개하는 생방송에서 아나운서가 나만 빼고 넘어갔던 때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큰 상처를 받아 대인 기피증이 오고 세상이 싫어졌다. 나는 링에 올라 최선을 다했을 뿐인데, ‘국가가 나를 버린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영화에서 아들이 ‘너희 아빠 금메달 가짜’라고 손가락질 받는 장면도 실제 있었던 일이다.”
88올림픽 당시 복싱 라이트미들급 결승에서 박 감독이 판정승을 거두던 순간. [중앙포토]

88올림픽 당시 복싱 라이트미들급 결승에서 박 감독이 판정승을 거두던 순간. [중앙포토]

IOC가 1997년 미국 측의 ‘심판 매수’ 주장을 기각하면서 박 감독은 편파 판정 시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승부 조작’ 프레임은 오래도록 그와 그의 가족들을 짓눌렀다.

판정이 왜 그렇게 난 건지 밝혀진 게 있나.
박=“첨예한 냉전 와중에 동독이 미국을 (금메달 개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심판을 매수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88올림픽에서 동독은 미국보다 1개 많은 37개의 금메달을 기록했다) 올림픽 상위권에 진입하기 위한 사회주의, 자본주의 국가들 싸움에 내가 희생양이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런 부분이 영화에서 다뤄지진 않았다.
권=“그런 부분까지 다루면 사회 드라마처럼 갈 수도 있었다. 나는 딱 10년 후의 이야기, 정말 좋아하고 잘하던 일을 포기했던 사람이 다시 그 일에 뛰어드는 순간을 담아내고 싶었다. 어른들 때문에 상처받은 박시헌이 33살의 체육 교사가 돼서 저마다 상처가 있는 학생들과 같이 성장하는 이야기를 밝은 톤으로 그려내려 했다.”

권 감독의 말처럼 영화는 박시헌이 윤우(성유빈)를 비롯한 여섯 명의 제자들과 아내 일선(오나라), 교장(고창석) 등 주변 사람들의 지지 덕분에 과거 상처를 극복하는 순간을 담아냈다. 가슴 아픈 일화들만큼이나 따뜻한 조력자들의 존재도 “모두 실제”라는 게 박 감독과 권 감독의 설명이다.

“영화 덕분에 그간의 응어리가 풀렸다”는 박 감독이지만, 그의 ‘카운트’까지 완전히 끝난 건 아니다. “복싱은 다운됐다고 끝이 아니다. 다시 일어나라고 카운트를 10초나 주거든”이라는 극중 대사처럼, 그는 “내 손으로 ‘진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를 만드는 날까지, 내 ‘카운트’는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