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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메달 따고도 '국민 망신' 비난…"35년 응어리, 영화가 풀어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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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카운트'는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복싱 금메달을 받았지만, 편파 판정으로 얻은 메달이라는 국민적 비난에 시달렸던 박시헌 전 복싱선수(현 서귀포시청 복싱팀 감독)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사진 CJ ENM

영화 '카운트'는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복싱 금메달을 받았지만, 편파 판정으로 얻은 메달이라는 국민적 비난에 시달렸던 박시헌 전 복싱선수(현 서귀포시청 복싱팀 감독)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사진 CJ ENM

어떤 하루는 한 사람의 평생을 좌우한다. 23살의 유망 복싱선수 박시헌에겐 1988년 10월 2일이 그런 하루였다. 조국에서 열린 올림픽 마지막 날, 복싱 라이트미들급 결승에 출전해 금메달을 땄지만, 열세였던 경기 내용에 스스로도 어리둥절한 승리였다.

상대방 미국 선수 측은 심판 매수설을 주장하며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재심을 요구했고, 국내 언론마저 ‘억지 금메달’ ‘잘 치른 대회에 오점’ ‘망신스럽다’ 등의 표현을 써가며 비난을 쏟아냈다. 빗발치는 질타 속에 청년 박시헌은 해명 한번 못해본 채 링 위를 떠나야 했다.

“펑펑 울고 싶더라고요. 35년간 가슴에 묻어둔 상처를 영화가 씻어주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쌓여온 응어리를 풀어준 건 자신의 삶을 스크린에 옮긴 영화 한 편이다. 지난달 22일 개봉한 영화 ‘카운트’는 88올림픽 이후 10년 뒤, 박시헌이 고향인 경남 진해에서 제자들을 길러내던 시절의 실화를 그렸다. 배우 진선규가 연기한 그의 캐릭터는 영화에서도 그대로 ‘박시헌’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영화 '카운트'의 권혁재 감독(오른쪽)과 이야기의 실제 모델인 박시헌 서귀포시청 복싱팀 감독을 지난달 24일 서울 강남구 한 스튜디오에서 만났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영화 '카운트'의 권혁재 감독(오른쪽)과 이야기의 실제 모델인 박시헌 서귀포시청 복싱팀 감독을 지난달 24일 서울 강남구 한 스튜디오에서 만났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비운의 선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 권혁재(43) 감독과 실화의 주인공 박시헌(58) 현 서귀포시청 복싱팀 감독을 지난달 24일 서울 강남구 한 스튜디오에서 만났다. 마찬가지로 영화에 본명이 쓰인 박 감독의 아내 조일선(55)씨까지. 한자리에 모인 이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위안이자 치유가 됐다”는 진심 어린 인사를 건넸다.

Q. 전작 ‘해결사’ 이후 13년 만의 복귀작에서 박시헌 선수 실화를 다루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권혁재(이하 권)= 준비하던 영화 두세 편이 무산되는 부침이 있었다. 그러던 2016년쯤 제작사(필름케이) 대표가 건네준 시나리오 중 하나에 88올림픽 복싱 금메달을 둘러싼 이야기가 담겨있었다. 박시헌이란 인물의 이야기가 위안이 되더라. 연출 공백기가 길어지면서 많이 움츠러들었던 시기였다. 어려움 속에 희망을 찾는 ‘착한’ 이야기라 (흥행이) 걱정됐지만, 내게 큰 위안이 됐으니 영화로 만들면 다른 사람들도 희망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박시헌을 직접 만나 봐야겠다는 마음으로 태릉선수촌을 찾아갔다. (※당시 박 감독은 리우 올림픽 복싱 국가대표 감독이었다)

Q. 박 감독 입장에선 영화화가 부담스러웠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박시헌(이하 박)= 이건 아내가 대신 답을…. (웃음)
조일선(이하 조)= 나는 영화 제작에 동의해주면 이혼할 거라고 그랬다. 권 감독 이전에 끈질기게 영화화 제안을 해온 분이 있었는데, 전화 올 때마다 내가 끊어버렸다. 아이들이 어린데 영화 때문에 그 일이 들춰지면 상처받을 수도 있고, 대중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애들이 다 자란 다음에 물어보니 영화로 나와도 좋을 것 같다고 하더라. 그래서 용기를 냈다.

88년 서울올림픽 당시 자신의 첫 경기를 하루 앞두고 올림픽공원에서 기념 사진을 찍은 박시헌(왼쪽) 선수와 아내 조일선씨. 각각 23살, 20살이었다. 이들의 실화를 영화로 만든 권혁재 감독은 ″이 사진이 영화 구상에 큰 도움이 됐다″고 했다. 사진 박시헌 감독 제공

88년 서울올림픽 당시 자신의 첫 경기를 하루 앞두고 올림픽공원에서 기념 사진을 찍은 박시헌(왼쪽) 선수와 아내 조일선씨. 각각 23살, 20살이었다. 이들의 실화를 영화로 만든 권혁재 감독은 ″이 사진이 영화 구상에 큰 도움이 됐다″고 했다. 사진 박시헌 감독 제공

영화 '카운트'에서 배우 오나라가 연기한 '일선'이라는 캐릭터명도 박시헌 감독의 아내 조일선씨의 이름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두려운 마음에 아직 영화를 보지 못했다는 조씨는 "영화 개봉 후 남편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으로 바뀌어서 정말 감격스럽다. 여태껏 살아온 날들 중 요즘 며칠 동안의 남편이 가장 행복해 보인다"고 했다. 사진 CJ ENM

영화 '카운트'에서 배우 오나라가 연기한 '일선'이라는 캐릭터명도 박시헌 감독의 아내 조일선씨의 이름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두려운 마음에 아직 영화를 보지 못했다는 조씨는 "영화 개봉 후 남편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으로 바뀌어서 정말 감격스럽다. 여태껏 살아온 날들 중 요즘 며칠 동안의 남편이 가장 행복해 보인다"고 했다. 사진 CJ ENM

IOC가 1997년 미국 측의 ‘심판 매수’ 주장을 기각하면서 박 감독은 편파 판정 시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한번 덧씌워진 ‘승부 조작’ 프레임은 오래도록 그와 그의 가족들을 짓눌렀다.

Q. 올림픽 이후 받은 상처가 컸을 것 같다. 
박= ‘매국노’라는 손가락질부터 ‘메달을 반납하라’는 야유까지…. 수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들을 쭉 세워놓고 소개하는 생방송에서 아나운서가 나만 빼고 넘어갔던 때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큰 상처를 받아 대인 기피증이 오고 세상이 싫어졌다. 나는 링에 올라 최선을 다했을 뿐인데, 결과가 그렇게 돼버리니까 ‘국가가 나를 버린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영화에서 아들이 ‘너희 아빠 금메달 가짜’라고 손가락질 받는 장면도 실제 있었던 일이다.

Q. 판정이 왜 그렇게 난 건지 밝혀진 게 있나. 
박= 첨예한 냉전 와중에 동독이 미국을 (금메달 개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심판을 매수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88올림픽에서 동독은 미국보다 1개 많은 37개의 금메달을 기록했다) 올림픽 상위권에 진입하기 위한 사회주의, 자본주의 국가들 싸움에 내가 희생양이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Q. 그런 부분이 영화에서 다뤄지진 않았다. 
권= 그런 부분까지 다루면 사회 드라마처럼 갈 수도 있었다. 내가 처음 읽은 시나리오도 복싱계 현실을 어둡게 그린 이야기였다. 그런데 나는 딱 10년 후의 이야기, 정말 좋아하고 잘하던 일을 포기했던 사람이 다시 그 일에 뛰어드는 순간을 담아내고 싶었다. 기득권, 어른들 때문에 상처받은 박시헌이 33살의 체육 교사가 돼서 저마다 상처가 있는 학생들과 같이 성장하는 이야기를 밝은 톤으로 그려내려 했다.

영화 '카운트'는 88올림픽 이후 선수 생활을 은퇴한 박시헌이 모교인 진해 중앙고에서 복싱부를 만들어 제자들을 길러내는 이야기를 담았다. 극중 시헌(진선규)은 자신과 비슷하게 어른들의 승부 조작으로 복싱을 포기해야 했던 윤우(성유빈)를 훈련시키며 더불어 성장한다. 사진 CJ ENM

영화 '카운트'는 88올림픽 이후 선수 생활을 은퇴한 박시헌이 모교인 진해 중앙고에서 복싱부를 만들어 제자들을 길러내는 이야기를 담았다. 극중 시헌(진선규)은 자신과 비슷하게 어른들의 승부 조작으로 복싱을 포기해야 했던 윤우(성유빈)를 훈련시키며 더불어 성장한다. 사진 CJ ENM

영화 '카운트'에는 박시헌 감독의 모교(진해중앙고)가 있는 도시이자 그를 연기한 배우 진선규의 고향이기도 한 경남 진해의 아름다운 풍광이 가득 담겼다. 박 감독은 "영화에 나온 곳들 전부 실제 선수들이 달리는 코스"라며 웃었다. 사진 CJ ENM

영화 '카운트'에는 박시헌 감독의 모교(진해중앙고)가 있는 도시이자 그를 연기한 배우 진선규의 고향이기도 한 경남 진해의 아름다운 풍광이 가득 담겼다. 박 감독은 "영화에 나온 곳들 전부 실제 선수들이 달리는 코스"라며 웃었다. 사진 CJ ENM

권 감독의 말처럼 영화는 박시헌이 윤우(성유빈)를 비롯한 여섯 명의 제자들과 아내 일선(오나라), 교장(고창석) 등 주변 사람들의 지지 덕분에 과거 상처를 극복하는 순간을 담아냈다. 특히 시헌과 비슷하게 어른들의 부패 때문에 복싱을 포기했던 윤우는 시헌에게 복싱부 코치라는 새로운 목표를 갖게 해주는 존재다. 일선은 남편이 복싱부 활동에 연금을 털어 넣는 것도 흔쾌히 동의해주고, 교장 역시 끝까지 시헌을 감싸준다. 가슴 아픈 일화들만큼이나 따뜻한 조력자들의 존재도 “모두 실제”라는 게 박 감독과 권 감독의 설명이다.

Q. 교사로서의 삶은 어땠나.
박= 실제로 체육고등학교를 다니다 그만두고, 나한테 배우려고 이쪽(진해중앙고)으로 온 애들이 많았다. 13년간 교직에 있다가 2001년부터 국가대표 코치를 했는데 내게 지도자의 길은 현재 진행형이다. ‘떳떳하지 못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기에 내 손으로 ‘진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를 만들고 명예를 회복할 때까지 지도자 생활을 계속할 생각이다.

‘카운트’가 첫 단독 주연작인 진선규의 고향이 박 감독과 같은 경남 진해이고, 그가 10년 넘게 취미로 해온 운동도 복싱이라는 점 등 박시헌과 진선규 사이 인연의 고리도 한두 개가 아니다. 35년간 불명예를 짊어져 온 복싱감독, 데뷔 19년 만에 첫 단독 주연을 맡은 배우, 그리고 10년의 공백기를 견뎌낸 영화감독까지. 숱한 스포츠 휴먼 영화들 가운데 ‘카운트’만의 진정성이 더욱 뭉클하게 다가오는 건, 이들 각각의 ‘꺾이지 않는 마음’이 영화에 단단히 모이고 포개졌기 때문일 터다.

영화 '카운트' 속 주인공 박시헌(진선규)의 실제 모델인 박시헌 제주 서귀포시청 복싱팀 감독을 지난달 24일 서울 강남구 한 스튜디오에서 만났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영화 '카운트' 속 주인공 박시헌(진선규)의 실제 모델인 박시헌 제주 서귀포시청 복싱팀 감독을 지난달 24일 서울 강남구 한 스튜디오에서 만났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영화 덕분에 그간의 응어리가 풀렸다”는 박 감독이지만, 그의 ‘카운트’까지 완전히 끝난 건 아니다. “복싱은 다운됐다고 끝이 아니다. 다시 일어나라고 카운트를 10초나 주거든”이라는 극중 대사처럼, 그는 반드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를 키워내겠다는 꿈을 위해 지금도 굵은 땀방울을 흘리고 있다.

“심판들이 판정으로 장난치는 경우도 있지만, 저는 ‘편파 판정으로 금메달 딴 사람’이란 꼬리표 때문에 심판부에 항의를 못 합니다. 선수들은 그런 제가 야속할 때도 많을 거예요. 그래도 내 손으로 ‘진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를 만드는 날까지, 내 ‘카운트’는 끝나지 않을 겁니다. 스포츠계뿐 아니라 우리 사회에도 공정성이 지켜져서 나처럼 상처받는 사람이 더는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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