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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여행 와서야 오늘 삼일절인 것 알았다"...흐릿해진 '노재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최근 휴가를 내고 일본 오사카(大阪)·교토(京都)로 여행을 떠난 직장인 양모(33)씨는 주요 관광지를 들를 때마다 심심찮게 들려오는 한국어에 새삼 일본 여행 붐을 실감했다. 지난해 10월 무비자 입국을 재개한 뒤 일본을 여행지로 택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는 것이다. 양씨는 “공항이나 식당 등 가는 곳마다 한국인들로 가득하더라”며 “기념품을 사러 간 오사카 시내 유명 잡화점에선 한국인들이 몰려 계산대에서 20분이나 기다렸다”고 말했다. 지난해 12월에도 후쿠오카(福岡)에 다녀온 그는 “엔화가 저렴한 덕에 일본을 자주 가게 됐다”며 “노재팬(No Japan)이라는 말은 옛말이 된 것 같다. 올해 안에 한 차례 더 일본에 갈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1일 오전 인천국제공항 제1여객터미널 출국장에서 승객들이 일본행 비행기 탑승수속을 위해 줄을 서고 있다.   일본 무비자 입국이 재개된 지난 10월 이후 우리나라 국민들의 일본 방문은 꾸준히 늘어 지난달에는 일본 전체 외국인 방문객의 37.7%에 달하는 수치를 기록했다. 연합뉴스

1일 오전 인천국제공항 제1여객터미널 출국장에서 승객들이 일본행 비행기 탑승수속을 위해 줄을 서고 있다. 일본 무비자 입국이 재개된 지난 10월 이후 우리나라 국민들의 일본 방문은 꾸준히 늘어 지난달에는 일본 전체 외국인 방문객의 37.7%에 달하는 수치를 기록했다. 연합뉴스

‘노재팬’이란 2019년 7~8월 일본 정부가 소재·부품·장비 등에 대한 대(對)한국 수출규제에 나서면서 촉발된 일본 불매운동을 말한다. 당시 일본산 제품을 사지 않고, 일본여행을 자제하자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2018년 약 704만명이었던 일본 방문객 수는 2019년 약 535만명으로 줄었다(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 통계월보). 같은 기간 주요 여행국인 베트남·중국·필리핀·태국·미국·대만 방문객 수가 소폭 늘어난 것과 대조적이다. 그러나 코로나19로 닫혔던 국경이 지난해 다시 열리면서 일본 방문객 수는 주요국 중 가장 빠른 속도로 늘고 있다.

법무부 통계월보에 따르면, 일본 정부가 무비자 입국을 재개한 지난해 10월 이후 일본 방문객 수는 약 13만명(지난해 10월)→약 33만명(지난해 11월)→약 46만명(지난해 12월)→약 58만명(지난 1월) 등 월마다 큰 폭으로 느는 추세다. 지난 1월만 보면 전년 대비 무려 2만2160%나 증가한 수치다. 주요국 중 압도적 1위다. 여행사 노랑풍선 관계자는 “지난해 11~12월 일본 패키지여행 송출객 수는 2019년 동기 대비 약 1000% 증가했다”고 말했다. 하나투어 관계자도 “지난해 코로나 규제가 풀린 뒤 일본 여행이 가장 빠른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이미 2019년 이전 수준으로 올라섰다”고 말했다.

서울 중구청은 일본의 수출규제가 본격화한 2019년 8월 6일 오전 서울 시내에 일본 불매운동 깃발을 내걸었다가 논란 끝에 철거했다. 연합뉴스

서울 중구청은 일본의 수출규제가 본격화한 2019년 8월 6일 오전 서울 시내에 일본 불매운동 깃발을 내걸었다가 논란 끝에 철거했다. 연합뉴스

노재팬 운동으로 매출이 반토막(2018년 1조4188억원→2019년 5746억원) 났던 한국 유니클로의 인기도 반등하고 있다. 한국 유니클로는 지난해 전년 대비 20.9% 상승한 7042억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2021년 529억원에 불과했던 영업이익은 지난해 1148억원으로 116.8%나 증가했다. 주류 시장에서도 2030 세대를 중심으로 하이볼 등 일본 술이 인기를 끌면서 일본산 주류 수입량이 부쩍 늘었다. 관세청 수출입무역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일본 위스키 수입액은 전년 대비 31.4%, 일본 맥주 수입액은 전년 대비 110.7% 상승했다.

‘예스재팬(Yes Japan)’ 현상은 문화시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지난 1월 개봉한 일본 애니메이션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전날(2월 28일) 기준 누적 관객 수 364만명으로 줄곧 박스오피스 1~2위를 오르내리고 있다. 온라인상에서는 “노재팬인데 슬램덩크는 못 참는다”는 말이 밈(meme)처럼 회자하기도 했다. 유튜브에서도 ‘오사카에 사는 사람들TV’ 마츠다 부장, 일본인을 흉내 내는 ‘다나카’ 캐릭터 관련 콘텐트가 높은 조회 수를 기록하면서 대중의 관심을 받았다. 최근에는 일본 만화 캐릭터 포켓몬 스티커를 수집하려는 사람들이 경쟁적으로 포켓몬빵을 사들이면서 품절 대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2019년 8월 이후 '노재팬' 운동을 주도한 인터넷 사이트 중 하나인 '노노재팬'은 지난해 3월 11일 서비스를 종료하면서 ″'불매'라는 부정적인 에너지에 기반한 목소리를 멈추기 위함″이라고 설명했다. 사진 노노재팬 사이트 캡처

2019년 8월 이후 '노재팬' 운동을 주도한 인터넷 사이트 중 하나인 '노노재팬'은 지난해 3월 11일 서비스를 종료하면서 ″'불매'라는 부정적인 에너지에 기반한 목소리를 멈추기 위함″이라고 설명했다. 사진 노노재팬 사이트 캡처

이 같은 일본 여행·문화 호감도 상승에는 노재팬 운동이 시간이 지나면서 희미해진 것 외에도 정치·경제·사회 등 복합적 이유가 작용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이념보다는 실용을 중시하는 MZ세대의 경우 악화한 한일관계라는 정치적인 문제와 자신의 취향에 따른 문화 소비를 구분하는 성향이 강하다”며 “새 정부가 출범하면서 한일관계 회복 노력을 기울이는 점, 엔저 현상으로 일본여행의 편익이 커진 점 등도 영향을 줬다고 본다”고 말했다. 실제 일본을 여행 중인 30대 직장인 A씨는 “일본에 와서야 오늘이 삼일절이란 걸 알았다”며 “기념일은 기념일대로 기리고, 휴가는 내 취향대로 즐기면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다만, 일각에는 일본 관련 소비의 경우 언제나 발화 가능성이 있는 불씨를 안고 있단 지적도 있다. 간헐적으로 전해지는 일본 정치인의 과거사·독도 관련 망언 등과 산업적 경쟁 관계 등이 요인으로 지목된다. 최근 오사카 여행을 다녀온 김모(32)씨는 “한일관계가 또다시 악화한다면 그런 분위기 속에서 굳이 일본을 휴가지로 선택할 것 같진 않다”고 말했다. 구정우 교수는 “국민 정서상 일본과 관련한 것은 늘 단기간의 변곡점이 있을 수밖에 없다”며 “정부가 그런 점을 고려해 한일관계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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