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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양성희의 시시각각

학폭에 대처하는 자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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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양성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학교폭력(학폭)으로 아이돌들만 훅 가는 줄 알았다. ‘미투’에 이어 요 몇 년 새 연예계의 뜨거운 이슈가 학폭이었다. 일부는 팀을 탈퇴하거나 활동을 중단했고, 제작 중인 드라마가 엎어지기도 했다. 잠시 자숙한다 해도 비판 여론이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아이돌·연예인의 어린 팬층에 학폭은 남의 문제가 아닌 데다 피해자의 고통은 여전한데 가해자는 만인의 사랑을 받으며 승승장구하는 건 정의롭지 못하다는 인식이 확대됐다. 물론 어린 시절 한때의 잘못이 평생 가는 주홍글씨가 되는 건 가혹하고 가해자여도 구제받을 기회는 줘야 한다는 얘기도 일리가 있지만 그건 자기 잘못을 인정·반성하고 합당한 대가를 치렀을 때 얘기다. 상황에 몰려서 하는 ‘뒤늦은, 비즈니스형 사과’가 통할 리 없다. 그래서 요즘 기획사에서는 신인 아이돌과 계약할 때 무엇보다 과거 학폭 여부를 민감하게 살펴본다.

국가수사본부장 임명 하루 만에 아들의 과거 학폭 논란으로 낙마한 정순신 변호사의 검찰 재직 시절 모습. 정 변호사는 이번 학폭 논란과 관련해 ″두고두고 반성하며 살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연합뉴스]

국가수사본부장 임명 하루 만에 아들의 과거 학폭 논란으로 낙마한 정순신 변호사의 검찰 재직 시절 모습. 정 변호사는 이번 학폭 논란과 관련해 ″두고두고 반성하며 살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연합뉴스]

 아마도 학폭은 (사건의 당사자이거나 목격자이거나) 우리 아이들이 경험하는 최초의 정의, 권력의 문제일 것이다. 학폭 자체도 문제지만 학폭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더 커지는 경우가 많다. 화제의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가 바로 그런 드라마다. ‘더 글로리’에서 학폭 피해 여고생을 도와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학교도, 담임도, 친구들도 모두 등을 돌리고, 심지어 친모마저 돈 몇 푼에 회유된다. 유력가 자제들인 가해자들은 학폭의 과거를 말끔히 씻은 뒤 사회적으로 성공한다. 성장한 피해자가 사적 응징에 나서는 게 드라마의 줄거리다. 학폭이 그저 철없는 아이들 간의 다툼이나 선악,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계층과 불평등, 사회 정의의 문제란 걸 짚어 드라마는 크게 성공했다.

화제의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 학폭 피해자가 성장 후 사적 복수에 나서는 내용이다.    [넷플릭스]

화제의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 학폭 피해자가 성장 후 사적 복수에 나서는 내용이다. [넷플릭스]

 신임 국가수사본부장 임명 하루 만에 아들의 학폭 논란으로 낙마한 정순신 변호사의 경우도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아들이 지방 명문 자사고 재학 중 일어난 학폭에 대해 ‘물리적으로 때린 것도 아니고 언어폭력이라 맥락이 중요하다’는 식으로 맞섰던 그다. 징계 처분(강제전학)에 불복해 재심 청구, 행정소송, 집행정지 신청 등 모든 법적 절차를 동원했다. 1년 넘는 소송으로 가해자와 피해자의 분리가 이뤄지지 않았고, 피해자는 극단적 선택을 시도하기도 했다. 비록 패소했지만, 대법원까지 가는 ‘시간 끌기’ 전략으로 아들은 전학을 최대한 늦췄고, 학폭 징계 기록의 영향을 덜 받는 정시 전형을 통해 최고 명문대에 진학했다. 법 전문가 아버지의, ‘최악의 아빠 찬스’란 얘기가 나오는 까닭이다. 2차 가해에 준하는 부모의 개입과 대처가 문제를 더 악성으로 만들었다.
 제 아들만 감싸고 잘못을 인정하지 않은 점, 아들에게 잘못했을 때는 사과하고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을 교육하지 않은 점, 그런 흠결에도 고위 공직에 봉사하겠다고 나선 점. 이 모든 게 정 변호사의 잘못일 것이다. 정 변호사는 공직 예비후보자 사전질문서의 ‘배우자, 직계존비속이 관계된 소송이 있느냐’는 문항에도 사실대로 답하지 않았다.
 대통령실은 정 변호사의 자진사퇴 이후 임명 취소까지 하면서 발 빠른 손절에 나섰지만, 인사 검증 부실 논란은 피할 수 없어 보인다. 재력 있는 학폭 가해자 측에 각종 팁을 주는 ‘학폭 전담 법률 컨설팅’ 시장까지 생겼다는데 가해자는 처벌받고 반성하며, 피해자는 보호받고 치유되는 ‘교정’과 ‘교육’ 대신 소송이 난무하는 현실이라니 입맛이 쓰다. 특히 대입에 반영되는 생기부(학생생활기록부)에 학폭위(학교폭력대책심의위원회) 처분 결과를 기록하게 제도를 강화한 것이 생기부 기재를 피하거나 늦추려는 소송 남발로 이어져 오히려 실질적 피해자 보호에 실패하는 아이러니도 바로잡아야 한다. 법 지식을 동원해 아들 학폭을 묻으려 한 정 변호사에 앞서 자녀의 입시 비리에도 잘못 없다던 전 법무부 장관이 떠오른다. 법과 정의를 수호하는 법 전문가 아버지들의 계속된 일탈, 국민의 분노와 상처가 깊다.

자녀 학폭으로 낙마한 국수본장 #법 전문가 아버지의 처신, 충격적 #학폭 생기부 기록 제도 보완 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