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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딸’과 발췌개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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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윤성민 기자 중앙일보 기자
윤성민 정치에디터

윤성민 정치에디터

건국 초기 국회 회의록을 보면 놀랄 때가 많다. 식민지배에서 막 벗어난 때인데도 민주주의에 대한 수준 높은 고민이 담겨 있다. 1948년 6월 23일 회의록을 보자. 김약수 의원은 대통령제의 한계를 지적하는데, “불란서(프랑스)보다도 남미의 혁명이 많이 일어나는 것은 (…) 대통령제의 결함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며 “대통령의 권력과 권한은 도무지 변하지 않는다. 거기에 대한 항거 태도는 혁명으로 일어난다”고 말했다.

1952년 9월 10일 회의에선 민주주의의 기본 절차인 투표 방식이 안건으로 올라왔다. 당시까지만 해도 국회 의원들은 거수나 기립으로 찬성 의사를 표현했다. 무기명투표는 국회의장이 필요하다고 판단할 때만 했는데, 잡음이 생길 것을 우려해 의장이 무기명투표를 결정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이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헌법개정안을 비롯해 인사관계결의안 등은 무기명투표로 결정하도록 하는 개정안이 제출됐다. 그런 사안은 눈치 보지 않는 투표가 중요하다고 봐서다. 당시 곽상훈 의원은 “기립방식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또는 표결하는 방식에서 각자의 절대적인 자유보장을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결국 개정됐다.

자유롭게 투표할 권리라는 이념은 국회법 112조에 남아있다. 지난 27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에 대한 체포동의안이 무기명투표로 진행된 것도 ‘인사에 관한 안건은 무기명투표로 표결한다’는 조항 때문이다. 그런데 이 대표의 강성 지지층인 ‘개딸’들은 체포동의안 반대표가 예상보다 적게 나오자 색출 작업에 돌입했다. 찬성표나 무효·기권표를 던졌을 것 같은 비명계 의원들 명단을 만들어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렸다. 의원들의 전화번호도 적어 전화·문자 공격을 유도했다. 의원들에게 어떤 표를 던졌는지 묻고 그 답을 담은 ‘검증글’도 올라온다.

1952년 9월 개정된 국회법의 무기명투표 대상에 개헌안이 포함된 건 그해 7월 이승만 정부의 ‘발췌개헌’ 때문이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재선을 위해 직선제로 헌법을 고치려 했다. 군대가 국회의사당을 포위한 상태에서 개헌안 표결이 이뤄졌다. 자리에서 일어나면 찬성, 앉아 있으면 반대였다. 찬반이 훤히 보이는 투표였다. 재석 163명 중 163명이 일어났다. 아무도 반대하지 못했다. 개딸들은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