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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역지사지(歷知思志)

3·1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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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유성운 기자 중앙일보 기자
유성운 문화부 기자

유성운 문화부 기자

해방 후 처음 치러진 1946년 3·1절 행사는 남산과 서울운동장(옛 동대문운동장)에서 따로 열렸다. 좌익은 남산공원, 우익은 서울운동장에서 각각 행사를 연 것. 6·25 전쟁 전까지 남산과 서울운동장은 좌·우익의 무대였다. 좌익은 남산에서 모스크바 3상 회담 지지 및 신탁 찬성 시위를 벌였고, 우익은 서울운동장에서 모스크바 3상 회담 반대 및 신탁 반대 시위를 열며 세 과시를 했다. 당시는 38선 이남에서도 좌익의 조직력이 우익을 능가했다. 1948년 주한 미 대사관 부영사로 왔던 그레고리 헨더슨은 저서 『소용돌이의 한국 정치』에서 “당시 청년 그룹 대부분은 공산주의 청년동맹에서 파생한 것들로, 정치성을 띠고 선동적이었으며 좌파가 선두를 달렸다”고 회고했다.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1946년 3·1절 행사도 마찬가지였다. 기록에 따르면 남산에는 10만명이, 서울운동장에는 3만명가량이 모였다. 좌익 쪽이 3배가량 많이 동원한 셈이다. 우파의 완패에 충격을 받은 평안도 출신 우익 청년들은 서울 북창동 대송여관에 모여 대책을 논의했다. 이들은 우익계 인사들에게 거금의 후원금을 얻어내 38선 철폐를 요구하는 국민대회를 열기로 했다. 이 대회는 서울 정동의 소련 영사관에 돌을 던지고, 조선공산당 본부 및 좌익 계열 언론사를 습격하는 시위로 확산했다. 이를 주도한 서북 지역 청년들이 훗날 서북청년단의 주축이 된다.

정치적 분열이 이미 해방 전후 못지않다는 우려가 터져 나온 지 오래다. 이번 3·1절은 차이와 갈등을 덮고 나라를 세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러야 했는지를 되새겨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