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이 미국 정부의 반도체 보조금을 신청하려면 보육시설을 확충하고 초과 수익을 정부에 공유하기로 약속하는 등 엄격한 요구사항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외신 보도가 나왔다.
27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NYT)는 미국 상무부가 반도체과학법에 따라 28일부터 기업들로부터 보조금 신청을 받을 예정인 가운데 1억5000만 달러(약 2000억 원) 이상 보조금을 신청하는 기업에는 공장 직원과 공장 건설 노동자 등을 위한 보육 지원 방안 제출을 요구할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보육 지원 방안에는 공장·건설 현장 인근에 사내 어린이집을 설치하거나 직원에 직접 육아 보조금을 주는 안 등이 포함된다. 앞서 미국 정부는 반도체 지원법에 따라 총 390억 달러(약 50조 원)의 기업 지원금을 책정했고 28일부터 개별 기업의 보조금 신청을 받는다.
상무부가 이처럼 보육 서비스를 챙기는 이유는 아이 돌봄 문제가 노동자들에게 큰 걸림돌이기 때문이다.
NYT는 많은 미국인이 어린이집 등 보육 대책이 없어 일터에 가는 대신 집에 남아 자녀를 직접 돌보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특히 코로나 19 팬데믹 이전 기준 미국 35개 주에서 보육 서비스 공급이 잠재 수요보다 약 300만명 부족해 '돌봄 공백'이 생긴 상황에서 보육 산업 종사자는 코로나 19 탓에 오히려 5만8000명 줄어들었다. 어린이집 교사 중에서도 코로나 19 탓에 일을 그만두고 본인 자녀부터 돌봐야 하는 경우가 속출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일례로 마이크론이 1000억 달러(약 131조 원) 규모의 반도체 제조 투자를 발표한 뉴욕주 시러큐스 지역의 경우 돌봄 수요보다 보육시설이 턱없이 부족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나 러몬도 상무부 장관은 NYT에 "노동력을 더 확보하지 않는 한 반도체 지원법은 성공할 수 없고 보육 서비스 없이는 노동력 확보가 불가능하다"고 전했다. 이어 "향후 10년간 여성 100만명을 추가로 고용하고 훈련해 반도체와 기반 시설 산업에 종사하도록 만들겠다는 국가적 목표를 향해 반도체 제조업체, 건설사 등이 협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육아가 오롯이 여성의 몫만은 아니지만, 상당수 가정에서 여성이 육아를 도맡는 경우가 많고 그 결과 미 제조업 종사자 10명 중 3명만이 여성이라고 NYT는 전했다. 채드 무트레이 전미제조업협회(NAM) 산하 제조연구소 이사는 "제조업에 종사하는 여성이 적은 이유 중 하나가 육아 부담 때문"이라면서 "하지만 제조업계는 여성 인재를 결코 간과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일부 제조업체는 근로자들을 위해 현장에 24시간 탁아 시설을 두기도 했다. 도요타자동차는 1993년부터 켄터키주 공장에서, 2004년부터 인디애나주 공장에서 이러한 시설을 운영 중이라고 NYT는 전했다.
이와 함께 상무부는 보조금을 신청한 반도체 기업이 전망치를 크게 웃도는 실적을 올리면 수익 일부를 연방 정부에 공유하라고 요구할 방침이다. 보조금을 신청하는 기업은 구체적인 재정 계획을 제출하면서 연간 실적 전망치도 최대한 정확하게 산출해 미국 정부에 공개해야 한다. 이는 기업들이 보조금을 더 받으려고 일부러 예상 손실 규모를 과장하지 못하게 하는 조치다.
보조금을 신청하는 기업은 향후 5년간 자사주 매입계획을 상세히 설명해야 한다는 내용도 포함된 것으로 전해졌다. 자사주 매입을 하면 유통 주식 수가 줄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주가 부양에 도움이 된다. 러몬도 장관은 NYT에 "이렇게(엄격한 요구사항을 내놓게) 되면 기업들은 정말 필요한 기금만 신청할 것"이라며 "혈세가 '주주 주머니 채우기'에 이용되는 걸 막을 수 있게 된다"고 전했다.
이처럼 까다로운 조건이 붙으면서 한국 반도체 기업이 미국 측의 보조금 혜택을 받기 쉽지 않으리란 우려가 나오고 있다. 또 혜택을 받으려면 '가드레일 조항'에 동의해야 하는데, 이 경우 중국 등 미국이 정한 '우려 대상 국가'에 10년간 반도체 시설을 짓거나 추가 투자를 할 수 없게 된다. 중국에 반도체 생산시설을 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입장에선 장기적으로 사업에 차질을 빚을 수 있다.
앞서 삼성전자는 미국 텍사스 테일러시에 반도체 공장을 짓고 있으며 SK하이닉스는 미국 내 첨단 패키징 공장과 연구개발(R&D) 센터 건설 계획을 밝힌 바 있다. 단, 부지 등 세부 내용은 미확정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