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삶의 향기

이것도 인연인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8면

황주리 화가

황주리 화가

어린 시절, 나는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세상을 향해 한 발 내딛는 게 겁이 났다. 그래서 새로운 일을 대할 때마다 늘 가슴이 두근거렸다. 타고난 길치였던 내가 등사실에 가서 시험지를 가져오라는 선생님의 심부름을 받고 한참을 헤매다 맨손으로 교실로 돌아갔을 때, “왜 그냥 왔니?” 하시던 선생님의 의아한 눈길에 그냥 죽고 싶었던 마음, 그런 마음의 기억이 요즘 꿈에서 되풀이되는 것이다.

교실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학교 건물에서 어디가 우리 교실인지 몰라 헤매는 꿈, 지하철을 공짜로 타는 어르신이 된 요즘에 어린 시절의 그 두근거림이 되살아나는 건 왜일까. 급변하는 세상을 향해 내딛는 두려운 발걸음을 다시 경험한다. 그럴 때마다 인터넷에서 오늘의 운세를 즐겨보는 버릇이 생겼다. 하지만 운수대통의 하루라고 점괘가 나온 바로 그 날 아침 내게 대참사가 일어났다. 잠결에 누군가 내 이름의 통장을 만들어 고가의 명품을 샀다는 둥, 다른 날 같으면 수상하고도 남을 메시지를 운수대통이라는 점괘에 안심하고 눌러버린 것이다.

악몽과 같은 보이스 피싱의 기억
시리아 난민수용소의 휑한 풍경
튀르키예도 악몽서 깨어나기를…

그 뒤부터 일어난 일은 영혼을 탈탈 털리는 어이없는 프로세스였다. 손도 없고 발도 없는 유령의 목소리에 포위되어 가상의 시공간에서 진행된, 진짜보다 더 진짜처럼 느껴지던 보이스 피싱의 기억은 현실이 아닌 꿈속 같았다. 요즘 유행한다는 그 수법의 보이스 피싱 경고방송을 텔레비전에서 보지 못한 나는 세상일에 어리숙한 어린 시절로 돌아가 신출귀몰한 거짓말 게임에 말려들었다. 생각할 겨를 없이 계속 전화를 하며 지령을 내리는 모르는 목소리는 드디어 친숙한 목소리가 된다. 익명의 목소리에 끌려다니는, 숨막히는 첩보전을 능가하는 그렇게 집중된 시간을 나는 경험해본 적이 없다.

그때의 나는 나였을까. 그냥 홀리는 거다. 사기를 당하는지도 모르고 범인의 목소리에 끌려다닌 그 악몽의 기억은 겪어본 사람만 이해하는 순간이다. 친한 후배에게 털어놓으니 그녀가 말해줬다. “언니 그 보이스 피싱범도 알고 보면 ‘오징어 게임’처럼 타인에게 사기를 쳐야 살아남는 사람들일지도 몰라. 하지만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어리숙한 피해자들 역시 살아남기 위해 포식자는 꼭 잡아들여야 하지 않겠어요.”

인생이 꿈이라는 건 이 나이쯤엔 다 아는 유일한 진실이다. 운이 좋은 사람은 대체로 좋은 꿈을 꾸다 갈 것이며, 운이 나쁜 사람은 긴 악몽을 꾸다 가는 사람이리라. 꿈속의 가짜 검사는 말한다. “이것도 인연인데, 이 나쁜 놈들을 일망타진해서 선생님께 조금도 누를 끼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인터넷 검색에 똑같은 이름까지 있는 가짜 검사에게 심지어 나는 고마움까지 느낀다. 옛날 사람들이 여우에게 홀리듯 우리는 모르는 목소리에 홀려 홀라당 돈을 뺏긴다. “초록색 잠바를 입고 계시군요.” 그는 나를 계속 보고 있다. 폰 카메라로 내 일거수일투족이 다 실시간 중개되고 있다. 전화가 뚫려 경찰서로 금감원으로 검찰청으로 전화한다 해도 다 그가 받는다. 문득 옛날 영화 ‘트루먼 쇼’가 떠오른다.

그 악몽의 순간이 끝나고 오랫동안 허탈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며칠 전에 본 이슬람 극단주의 여성 지도자를 그린 다큐 필름이 생각난다. 전 세계의 여성들을 전사로 끌어들이는 SNS 표어가 떠오른다. ‘우울한 여성이여. 알라에 귀의하라. 오직 알라만이 행복을 준다.’ 전 세계의 수많은 이슬람 소녀들이 그 소리에 속아 시리아로 건너가 성노예로 살았다. 열세 번이나 계속 다른 남자에게 팔려가거나 경매에서 팔려나가는 일이 다반사였다는 끔찍한 악몽의 풍경이 시리아 난민 수용소의 황막한 풍경에 겹쳐졌다. 이 또한 보이스 피싱이 아닐 수 없다.

생각해보니 세 시간 동안의 악몽을 꾼 것만도 다행이었다. 유대인으로 태어나 2차 대전 당시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가지 않은 것도, 일제 강점기 시절 돈을 벌게 해준다는 말에 속아 정신대에 끌려가지 않은 것도, 납북되지 않은 것도 얼마나 다행한 일일까. 한동안 가짜 검사의 “이것도 인연인데” 그 말이 자꾸 맴돌면서 헛웃음이 났다. 하긴 악연도 인연이지, 하고 생각하니 살면서 악연을 만난 일이 거의 없는 것 같다. 그동안 얼마나 선한 인연들이 많았는지 일깨워주려고 이런 악연이 찾아온 건지도 모른다고 좋게 생각하기로 한다.

상실의 경험 없이는 느낄 수 없다는 행복의 감정은 한참이 지나서야 되돌아왔다. 튀르키예로 보내는 대형 택배상자 안에 질 좋은 패딩 잠바와 따뜻한 옷가지들을 정성껏 싸서 넣었다. 정말 이것도 인연인데, 내 패딩 잠바를 입고 있을 누군가가 떠올랐다. 그녀의 몸도 마음도 조금쯤 따뜻해져, 곧 그 모든 나쁜 꿈에서 깨어나길.

황주리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