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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변양균 남기고 싶은 이야기

창문 깨진, 남루한 호남선의 충격…영남 학생의 인생을 바꿨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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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주정완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변양균 남기고 싶은 이야기] 진영을 넘어 미래를 그리다 〈21〉 학창 시절 ‘호남의 기억’

변양균 전 기획예산처 장관

변양균 전 기획예산처 장관

학창 시절 잊을 수 없는 충격을 받았던 적이 있다. 1969년 여름 스무살 때 호남선 열차를 처음 탔던 순간이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열차 상태가 좋지 않았다. 곳곳에 유리창이 깨진 상태로 방치돼 있었다. 그 전에 경부선을 탔을 때는 전혀 볼 수 없던 모습이었다. 열차 등급이 낮은 것도 아니었다. 아직 새마을호는 나오기 전이었지만 당시로선 최고 등급 열차였다.

승객들의 차림도 남루했다. 변변한 가방도 없이 보따리를 이고 진 사람들이 열차에 올라탔다. 대개는 시골 장터에 가는 보따리장수 같은 행색이었다. 경부선에서 자주 봤던 번듯한 차림의 여행객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대학 1학년 때 호남선 첫 여행길
유리창 깨진 최상급 열차에 충격
“먹고 살기 힘들다” 화가 꿈 포기
교련 거부로 반정부 낙인도 찍혀

1971년 봄 정부가 교련 교육을 강화하자 대학가에선 반대 시위가 벌어졌다. 사진은 같은 해 5월 고려대 학생들이 교련 폐지와 구속 학생 석방을 요구하며 거리 시위를 하는 모습. [중앙포토]

1971년 봄 정부가 교련 교육을 강화하자 대학가에선 반대 시위가 벌어졌다. 사진은 같은 해 5월 고려대 학생들이 교련 폐지와 구속 학생 석방을 요구하며 거리 시위를 하는 모습. [중앙포토]

고석규 전 목포대 총장은 한국학호남진흥원이 펴낸 『호남학산책』에 이런 글을 남겼다. “호남 차별, 그중에서도 호남선은 첫손에 꼽힌다. 단지 철도 건설의 지지부진에 그치는 게 아니라 그 위를 달리는 열차의 편수나 질에서도 인구 비례를 훨씬 넘는 차별을 보인다.” 이게 과장이 아니라는 걸 나는 학창 시절 호남선 열차를 타보고 절실히 느꼈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호남선 여행의 강렬한 체험은 나에게 세상을 보는 눈을 뜨게 해줬다. “지금까지 내가 알았던 세상은 반쪽짜리였구나.” ‘경상도 사람’인 나는 그 전까지 호남을 전혀 몰랐다. 우연한 기회에 친구가 호남선을 타보자고 했던 게 인생의 전기가 됐다. 전남 광주(현 광주광역시)를 거쳐 여수로 갔다가 배를 타고 부산으로 향했다.

나는 국가 발전에서 소외된 호남의 풍경을 마주하고 가슴이 뜨거워졌다. “이건 푸대접 정도가 아니다. 영남과 호남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구나.” 야당(신민당)에선 호남 푸대접론을 내세워 박정희 대통령과 여당(민주공화당)을 비판하던 시절이다. 그때부터 나는 나라가 바로 되려면 이대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내가 노무현 대통령을 만나 그의 경제 참모가 된 것은 어쩌면 이때 경험이 예정한 운명이었을지 모른다.

고3 때 경제학도로 진로 변경

나는 1949년 9월 25일(음력) 경남 통영에서 태어났다. 예전에는 충무라고 불렀던 곳이다. 조선 후기 삼도수군통제영이 있던 통영은 주변의 섬과 바다로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고장이다. 지금은 퇴보했지만 한때 조선·해운의 본거지이기도 했다.

아버지는 지금으로 치면 하위 계급의 해양경찰이었다. 어머니는 전업주부였다. 집안은 부자라고 할 수 없지만 끼니 걱정을 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버지는 자주 근무지를 옮겨 다녔다. 자연히 아버지를 따라 이사와 전학을 여러 번 다녔다.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때는 통영과 부산, 경남 마산을 왔다 갔다 했다. 그러다가 국민학교 6학년부터는 부산에서 학교를 나왔다. 부산에선 주로 영도에 살았다.

중학교에 다닐 때부터 나는 그림을 좋아했다. 부산고 2학년까지는 나름대로 미술대학 입시를 준비했다. 3학년에 올라가면서 진로를 바꿨다. 미대 진학에 대해 부모의 반대가 워낙 심했다. 예술가는 춥고 배고프다는 인식이 팽배하던 시절이었다. 스스로 생각해봐도 그림으로 성공할 것이란 확신이 없었다. 대신 공부는 조금만 열심히 하면 뭐라도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무렵 아버지는 해양경찰을 그만두고 친구들과 봉제업을 했다.

진로를 고민하던 나에게 가까운 친구의 형이 경제학을 권했다. 사실 경제학이 뭔지도 잘 몰랐다. 막연하게 밥 먹고 사는 문제가 경제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자기 밥벌이하는 것과 경제학은 별로 상관이 없었다. 첫해는 입시에 실패했고 이듬해 재수로 고려대 경제학과에 합격했다.

중앙정보부 불려가 반공 교육도 받아

1971년 고려대 경제학과 3학년이던 필자(왼쪽)가 하숙집 친구들과 찍은 사진. [사진 변양균]

1971년 고려대 경제학과 3학년이던 필자(왼쪽)가 하숙집 친구들과 찍은 사진. [사진 변양균]

1969년에 들어간 대학은 공부에 집중할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다. 대학 생활 4년 내내 정치적 혼란이 심했다. 3선 개헌 반대, 교련(학생 군사훈련) 반대, 부정선거 항의, 10월 유신 반대 등으로 학생 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학교 수업이 제대로 이뤄질 수가 없었다.

1971년 박정희 대통령의 위수령 발동은 지금도 뚜렷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군인들이 대학 캠퍼스까지 탱크를 끌고 왔다. 그들은 교내에 있던 학생들을 무차별 폭행하고 어디론가 끌고 갔다. 대학 담장 옆에 있던 하숙집에서 직접 두 눈으로 목격한 일이다. 시커먼 가죽점퍼를 입은 사람들이 밤중에 내가 있는 하숙집으로 들이닥치기도 했다. 그들은 시위 주동자를 찾는다며 학생들을 마구 때렸다.

나는 용기가 없어 학생 시위에 앞장서지는 못했다. 그런데도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에 불려간 적이 있다. 수강신청을 할 때 필수 과목인 교련을 빠뜨렸다는 이유에서다. 이 일로 나는 반정부 성향이란 낙인이 찍혔다. 대학생이라도 이쯤 되면 강제 징집되는 상황이었다. 아버지가 이런 사정을 알고 반정부 성향 분류에서 뺀다고 굉장히 애를 썼다. 이후 입대가 연기된 것을 보면 아버지의 노력이 성공한 모양이었다.

어쨌든 나는 정보부에서 다른 학생들과 함께 반공 교육을 받아야 했다. 강사로 나온 사람이 자수한 간첩이었다. 북한에선 김일성대를 나온 엘리트라고 했다. 그 사람은 “남한에 와보니 남한이 북한보다 훨씬 잘 사는 모습을 보고 자수를 결심했다”고 말했다. 나는 좀 어이가 없었다. 이런 질문을 던졌다. “그런 식이면 가난한 나라의 간첩이 부자 나라에 가면 다 전향한다는 겁니까.” 그 사람은 굉장히 당황스러워하며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나중에 자료를 보니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북한이 남한보다 경제력에서 앞서 있었다.

“작가가 돈까지 밝히면 되겠습니까”

젊은 혈기에 어른들에게 철없는 소리를 한 적도 있다. 사연은 이랬다. 1971년 1월 조선일보의 ‘학생논문’ 공모전에서 내가 쓴 글이 가작으로 뽑혔다. 예전에는 신춘문예와 별도로 학생논문이란 부문이 있었다. 내 글의 제목은 ‘농공병진의 경제전망’이었다. 상금은 그때 돈으로 30만원인가, 50만원인가 했다. 웬만한 공무원 월급의 열 배 정도였다.

얼마 뒤 신문사에서 신춘문예와 학생논문 당선자를 불러 시상식을 했다. 행사가 끝나고 심사위원들도 함께 모여 다과회를 열었다. 심사위원 중에선 교과서에 시나 소설 작품이 실릴 정도로 쟁쟁한 작가들이 있었다. 나는 최연소 참석자였을 것이다.

다과회에서 오가는 대화는 실망스러웠다. “문인들이 너무 가난하고 생활이 어렵습니다. 문학 하는 사람에 대한 국가나 사회의 대우가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지금 같으면 작가도 생활인이라고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는 말이었다. 그 시절 나에겐 ‘돈 타령’처럼 들렸다.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작가로서 명예를 얻고 존경을 받으면 충분한 것 아닙니까. 어떻게 돈까지 많이 가지려고 합니까.”

그 자리에 있던 문인들에겐 기가 막힌 얘기였을 것이다. 다행히 한 분이 “그래 맞다”고 내 편을 들어줬다. 그러면서 “작가가 물질적으로 풍족해지면 좋은 작품이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일본의 유명한 작가가 돈을 많이 벌고 나서 작품이 이상해졌다는 얘기도 나왔다. 나로선 20대 초반이라 겁도 없이 말을 꺼낸 것이지만 나중엔 후회를 많이 했다.

“지역주의 깨려면 호남 대통령 나와야”

그해 4월에는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현직 대통령인 박정희 공화당 후보와 김대중 신민당 후보가 맞붙었다. 나는 김대중 후보를 지지했다. 지역주의를 타파하려면 호남 사람이 대통령이 돼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해 2월 서울 장충단공원 유세에도 갔다. “이번에 정권교체를 하지 못하면 영구집권의 총통 시대가 온다”는 김 후보의 발언으로 유명했던 현장이다. 유세 현장에서 본 지지자들의 옷차림은 남루했다. 호남선 열차의 그 차림 그대로였다.

선거운동 마지막 날인 4월 26일에는 끔찍한 사고도 있었다. 그날 저녁 김 후보는 서울 신설동 대광고 운동장에서 연설했다. 마침 하숙집과 가깝기도 해서 나는 친구들과 함께 유세장을 찾아갔다. 유세가 끝나자 김 후보 얼굴을 보려는 인파가 출구 쪽으로 몰리며 압사 사고가 발생했다. 사망자가 두 명이 나오고 부상자도 속출했다.

이런 ‘호남의 기억’을 소환한 건 2009년 5월 노무현 대통령 장례식이었다. 초기에 나는 경남 김해 봉하마을에서 조문객을 받는 상주 역할을 했다. 조문객의 옷차림이 남루했다. 넥타이 하나 변변히 매지 않은 이들이 태반이었다. 그런 옷차림을 한 조문객은 처음 봤다. 안타까운 소식을 듣자마자 모든 일을 제쳐 두고 달려온 사람들이었다. 자기 부모라도 돌아가신 듯 오열하는 이들을 보며 40년 전 호남선 열차에서, 김대중 후보의 유세장에서 봤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아직 갈 길이 멀었구나.’ 학창 시절의 기억이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정리·대담=주정완 논설위원, 이정재 전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