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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후남의 영화몽상

일상의 우연, 그 흥미로운 상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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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후남 기자 중앙일보 문화선임기자
이후남 문화선임기자

이후남 문화선임기자

오랜만에 여고 동창회 참석차 고향에 다녀가는 길에 우연히 동창생과 마주친다. 전날 밤 동창회에선 못 본 친구다. 알고 보니 동창회 소식을 몰랐단다. 반가운 마음에 가던 길을 멈추고, 잠시 친구네 집에 들러 시간을 보내기로 한다. 딱히 특별할 것 없는, 누구라도 일상에서 겪을 법한 이 우연한 만남이 누구도 쉽게 상상 못 할 상황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전개되는 ‘다시 한 번’은 장편 ‘드라이브 마이 카’로 세계적 호평을 받은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단편영화다. 장편 위주의 극장가에서 단편이 설 자리가 별로 없는 건 일본도 마찬가지. 그런데도 단편에 애정이 남다른 감독은 각본을 쓸 때부터 전략적으로 접근했다. ‘우연’이라는 공통된 주제로, 각기 다른 세 편의 짧은 이야기를 여느 장편처럼 전체 두 시간 분량으로 만들어 단편 모음집 ‘우연과 상상’으로 내놓았다.

‘우연과 상상’의 세 번째 단편 ‘다시 한 번’. [사진 그린나래미디어]

‘우연과 상상’의 세 번째 단편 ‘다시 한 번’. [사진 그린나래미디어]

결과는 놀랍다. 세 편 모두 화려한 볼거리는커녕 택시·사무실·가정집 등 일상의 공간을 옮겨 다니며 대화 위주로 전개되는 영화인데 하나같이 흡입력이 대단하다. 긴장을 쌓아 올리고, 극적으로 터뜨리고, 단편마다 다른 방식으로 마무리하는 솜씨 역시 인상적이다. 아주 잘 쓴 단편소설을 모처럼 만난 기분이랄까. 매번 제작진이 7, 8명에 불과했다는 단출한 제작방식의 이 영화는 지난해 한국 극장가 개봉에 앞서 2021년 베를린영화제에서는 심사위원대상까지 받았다.

“이 영화의 핵심은 ‘우연’이에요. 일상은 기본적으로 틀에 박혀서 반복되죠. 다들 큰 변화 없이 살아요. 우연은 가끔씩 그 일상을 바꾸죠. 우리는 사실 우연이 스쳐 지나가도록 내버려 두지만 세 번째 이야기는 그 우연을 품는 이야기에요. (중략) 자신의 일상에 지루함을 느끼는 사람은 그 우연을 받아들이겠죠. 그러면 상황이 완전히 달라지고요. 여러분의 인생이 열리거나 뭔가가 닫힐 거에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고요.”

최근 나온 DVD에 수록된 인터뷰에서 감독이 한 말이다. 상대적으로 흥행 부담이 큰 장편과 달리 단편을 통해 감독이 발휘한 창의적 상상력은 일상에 잠재한 극적인 가능성을, 우연의 묘미를 흥미롭게 보여준다. 특히 반복되는 일상에 지친 관객이라면 신선한 공기처럼 다가갈 수 있는 영화다.

감독이 인터뷰에서 말한 “우연을 품는” 세 번째 이야기는 이 글 첫머리에 소개한 ‘다시 한 번’이다. 사실 이 단편만큼은 뜻밖에도 SF적인 설정이 있다. 악성 바이러스 때문에 인터넷 네트워크가 중단된 세상이 왔다는 설정인데, 덕분에 두 인물의 우연한 만남이 설득력을 더한다. 어쩌면 우연이야말로 인공지능 같은 정답 기계가 맹위를 떨치는 세상에서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극적인 기회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