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사설

물가 관리한다며 시장 자율 해치지는 말아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0면

정부가 주류업계의 소주 가격 인상 움직임과 관련해 실태조사에 착수했다. 소주의 원재료 격인 타피오카 가격, 주정 제조 과정에 필요한 에너지, 병 가격 상승 등 여파로 주류업계가 가격 인상 움직임을 보이자 정부가 제재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사진은 26일 오후 경기 수원시의 한 가게에서 소주와 맥주를 3000원에 팔고 있는 모습. [뉴스1]

정부가 주류업계의 소주 가격 인상 움직임과 관련해 실태조사에 착수했다. 소주의 원재료 격인 타피오카 가격, 주정 제조 과정에 필요한 에너지, 병 가격 상승 등 여파로 주류업계가 가격 인상 움직임을 보이자 정부가 제재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사진은 26일 오후 경기 수원시의 한 가게에서 소주와 맥주를 3000원에 팔고 있는 모습. [뉴스1]

정부, 통신비·유류·주류 가격에 전방위 개입

정부 역할은 공정 규칙 지키게 하는 데 그쳐야

정부가 물가 관리에 전방위로 뛰어들고 있다. 전기·가스·교통 등 공공요금 인상에 이어 최근 식당 소주 한 병 값이 6000원에 육박하는 등 생활 체감 물가가 큰 폭으로 오르고 있는 데 대한 움직임이다. 대통령과 경제부총리 등의 불호령이 터져나오고, 관계부처가 발 빠르게 대책을 내놓는 식이다.

공정거래위원회 시장감시국은 어제 통신 3사와 한국통신사업자연합회 등 주요 통신협회를 대상으로 현장조사에 나섰다. 대통령은 최근 비상경제민생회의에서 “금융·통신 분야의 독과점 폐해를 줄이고 실효적인 경쟁 시스템을 조성할 수 있는 공정시장 정책을 마련해 달라”고 주문했었다. 기획재정부는 주류업계의 소주 가격 인상 움직임과 관련해 제조사에 대한 실태조사를 진행하기로 했다. 국세청은 주류업계와 비공개 간담회를 열고 ‘소주값 인상 자제’ 의견을 전달했다고 한다. 산업통상자원부도 정유업계를 대상으로 도매가 공개 범위를 확대하고, LPG 가격 안정화에 적극 협조해 줄 것을 요청했다. 업계는 당혹스럽다는 입장이다. 정유업계에서는 “해외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규제”라는 목소리를 내고, 주류업계에선 “각종 원부자재 가격이 올라 인상이 필요하다”고 하소연한다.

물가 인상이 지나치게 가팔라 민생이 어려워진다면 정부가 나서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시장은 실패할 수도, 공정한 경쟁을 어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부의 지나친 시장 개입은 자제해야 한다. 정부가 정유사의 도매가 공개 범위를 확대하는 방안을 추진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정유사가 대리점·주유소에 공급하는 휘발유·경유 등의 가격을 지역별로 구분해 공개하면, 정부가 가격 인하를 직접 압박하지 않더라도 정유사 간 경쟁을 촉진해 석유제품 가격을 자연스럽게 낮출 수 있다. 하지만 기획재정부가 주류업계의 인상 동향과 수익 상황을 들여다보고, 국세청이 업계와 비공개 간담회까지 하는 건 과도한 측면이 있다.

정부의 역할은 시장 참여자가 공정한 룰을 어기고 숨어서 소비자의 주머니를 훔쳐내는 것을 잡아내는 데 그쳐야 한다. 가격 메커니즘에 섣불리 개입하게 되면 ‘오른쪽 깜빡이를 켜고 왼쪽으로 돈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다. ‘자유’는 현 정부가 대표적으로 내세우는 대원칙 아닌가. 자유시장경제를 우선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면서 시장의 가격에 과하게 개입하는 것은 모순이다. 당장은 정부가 가격을 묶어놓을 수 있다 하더라도 결국은 그 부작용이 더 크게 드러날 수밖에 없다. 최근 일련의 모습은 윤석열 정부의 정체성을 흐리는 게 아닌가 우려스럽다. 무역 규모 세계 6위권인 대한민국이 개별 소비재 가격을 일일이 통제하던 과거 권위적 관치의 시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