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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중앙] 세계 최고 자리서 일장기 가리며 일제 탄압 속 금빛 희망 전한 마라톤 영웅

중앙일보

입력

올해 3월 1일은 3·1절 104주년입니다. 일제 강점기 당시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조국의 독립을 위해 힘썼죠. 독립운동 이외의 방식으로 국민에게 힘을 실어준 이도 있는데요. 바로 1936년 제11회 베를린올림픽에서 마라톤 금메달을 딴 한국인 최초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마라토너 손기정(1912~2002)입니다. 손기정은 일제의 탄압을 받던 시기, 전 세계에 한국인의 위대함을 널리 알리고, 우리나라 국민에게 자긍심을 심어줬어요. 서연우 학생기자와 송중근 학생모델이 서울 중구 손기정체육공원에 있는 손기정기념관을 방문해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 봤습니다.

손기정기념관에서 마라토너 손기정 일대기를 알아본 송중근(왼쪽) 학생모델·서연우 학생기자가 기념관 바로 오른쪽에 있는 손기정 동상에서 태극기를 휘날리고 있다. 손기정 동상은 염원하던 태극기를 단 모습이다.

손기정기념관에서 마라토너 손기정 일대기를 알아본 송중근(왼쪽) 학생모델·서연우 학생기자가 기념관 바로 오른쪽에 있는 손기정 동상에서 태극기를 휘날리고 있다. 손기정 동상은 염원하던 태극기를 단 모습이다.

손기정 외손자인 이준승 손기정기념재단 사무총장 겸 손기정기념관 관장이 “손기정기념관은 할아버지 탄생 100주년을 맞이한 2012년에 세워졌어요. 원래 이곳은 할아버지가 다녔던 옛 양정고등보통학교(양정고보) 자리예요”라고 설명했어요. 그의 삶을 살펴보기 위해 1층 제1전시실 ‘첫 번째 세계인 손기정’ 코너로 향했죠. “할아버지는 1912년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태어나 가난한 유년 시절을 보냈어요. 압록강 철교를 달려 집에서 2km 떨어진 신의주약죽보통학교(초등학교)에 다녔죠. 어렸을 때부터 자신이 달리기에 소질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 할아버지의 어머니는 어려운 형편에도 일본 사람들이 즐겨 신던 엄지발가락이 따로 갈라진 외버선 모양의 신발로 고무 밑창을 댄 ‘지카다비’를 선물했어요. 할아버지는 어머니의 선물을 신고 달리기로 올림픽에 출전하겠다는 꿈을 키웠죠.”

손기정은 보통학교 졸업 후 육상선수로 신의주상업학교 입학 제의를 받았지만, 가정 형편이 어려워 진학하지 못했어요. 생활비를 벌면서 틈틈이 학비를 모았던 그는 세계 최고의 달리기 선수가 되겠다는 꿈을 잃지 않고 열심히 노력한 끝에 1932년 경성~영등포 왕복 마라톤대회에서 2위를 기록했죠. 이 성적으로 육상 명문 양정고보에 입학했어요. 고등보통학교는 중학교·고등학교가 같이 있는 교육기관인데, 손기정은 스무 살에 중학교에 입학한 겁니다. "양정고보에서 맹훈련한 할아버지는 1935년 11월 3일, 공인 기록을 세울 수 있는 메이저 마라톤 대회인 제8회 메이지신궁대회에서 2시간 26분 42초로 우승하며 세계 신기록 보유자가 됐어요. 이 대회는 베를린올림픽 1차 선발전을 겸했죠. 이 세계 신기록은 12년 뒤 1947년 제51회 보스턴마라톤대회에서 2시간 25분 39초로 경신돼요. 그 주인공은 할아버지의 제자 서윤복 선수였죠."

제8회 메이지신궁대회 시상대서 일본 국가가 흘러나오자 고개를 떨군 손기정.

제8회 메이지신궁대회 시상대서 일본 국가가 흘러나오자 고개를 떨군 손기정.

연우 학생기자가 메이지신궁대회 시상식 사진을 보면서 “손기정 선수의 표정이 좋지 않아요”라고 말했어요. “할아버지는 1910년 조국을 일본에 빼앗기고(경술국치) 2년 뒤에 태어났어요. 그래서 태극기도 본 적 없고, 우리나라 국가도 들어본 적 없었죠. 할아버지가 시상대에 올라서자 일본 국가가 흘러나왔는데요. 할아버지는 울면서 ‘왜 일본 국가가 연주되지?’ ‘우리 국가는 왜 없어?’라고 생각했어요.” 이후 3차까지 이어진 선발전 끝에 손기정은 남승룡 선수, 일본의 시오아쿠 선수와 함께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대표가 됐습니다.

1936년 8월 9일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경기 날까지, 손기정은 단 한 번도 일장기가 달린 훈련복을 입지 않았어요. 현지에서 사인할 때 한글로 ‘손긔정(손기정)’이라 쓰고, ‘코리아(Korea)’라고 조국을 밝혔죠. 중근 학생모델이 “일본이 불쾌하지 않았을까요?”라고 말했어요. “일본은 우리나라 선수가 올림픽에 나가는 걸 원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일본은 올림픽의 꽃인 마라톤 금메달을 거머쥐어 전 세계에 자신들의 위대함을 알리고 싶어서 세계 신기록 보유자인 할아버지를 출전시킬 수밖에 없었죠. 할아버지는 ‘일본이 나를 출전시키지 않으면 금메달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셨고, 그래서 당당한 행동이 나올 수 있었어요.”

손기정 외손자인 이준승(맨 오른쪽) 손기정기념관 관장이 소중 학생기자단에게 일장기 말소사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손기정 외손자인 이준승(맨 오른쪽) 손기정기념관 관장이 소중 학생기자단에게 일장기 말소사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손기정(왼쪽에서 세 번째)은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경기 전까지 현지에서 일장기가 달린 훈련복을 입지 않았다.

손기정(왼쪽에서 세 번째)은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경기 전까지 현지에서 일장기가 달린 훈련복을 입지 않았다.

결국 손기정은 2시간 29분 19초, 스물다섯 나이로 마라톤 경기 올림픽 신기록을 세우며 한국인 최초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됐습니다. 세계 최고가 됐지만 손기정은 고개를 숙이고, 부상으로 받은 월계관 기념수(월계수) 화분으로 가슴에 달린 일장기를 가렸죠. “할아버지는 세계 최고가 되는 꿈을 이뤘지만, 일장기가 올라가고 일본 국가가 울려 퍼지는 걸 스스로 받아들이지 못했어요. 개인의 영광도 조국이 없다면 무의미하다는 걸 깨달으셨죠.”

1936년 8월 24일, 동아일보 사회부 체육주임 이길용 기자는 오사카 아사히 스포츠지를 보다가 마라톤 시상식 사진과 손기정 가슴에 붙은 일장기를 발견했습니다. 이 기자는 사진 속 일장기를 지워 국내에 보도하길 원했고, 이른바 ‘일장기 말소사건’이 일어났죠. “8월 25일, 이 기자와 동아일보 관계자들은 일장기 부분을 청산가리 액으로 지우고 기사를 냈어요. 이 기자와 관계자들은 40일 동안 고문을 당했고, 동아일보는 무기 정간처분을 받았죠.” 일장기를 지운 보도를 본 우리나라 국민들은 일본도 하지 못한 것을 손기정이 해내 자긍심이 생겼습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점하면서 조선인들의 자긍심을 없애려고 했는데, 할아버지가 오히려 자긍심에 불을 붙였죠.”

1936년 제11회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경기 결승선에 도착하는 손기정.

1936년 제11회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경기 결승선에 도착하는 손기정.

손기정 가슴에 있는 일장기를 지우고 보도를 한 ‘일장기 말소사건’.

손기정 가슴에 있는 일장기를 지우고 보도를 한 ‘일장기 말소사건’.

손기정의 베를린올림픽 이야기는 제2전시실 ‘민족과 함께한 승리’로 이어졌습니다. 이곳엔 올림픽 마라톤 경기 당시 타임라인과 금메달·월계수관(국가등록문화재 제489호), 청동투구(보물 제904호) 등이 있어요. “이 청동투구는 복제품이에요. 진품은 할아버지가 국가에 기증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돼 있죠. 청동투구는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에게 준 특별 부상품이에요. 1936년 일본올림픽위원회가 할아버지에게 주기 싫어서 독일에 두고 왔는데, 서독올림픽위원회가 88 서울올림픽 개최를 2년 앞둔 1986년, 할아버지의 마라톤 우승 50주년을 기념해 그때 그 청동투구를 가져다줬죠.” 함께 받은 월계관 기념수(서울특별시 기념물 제5호)는 모교인 양정고보에 심었고, 현재는 양정고보 자리에 세워진 손기정기념관 오른쪽 마당에서 자라고 있어요. 제2전시실에서도 화면을 통해 실시간으로 나무 모습을 볼 수 있죠.

올림픽 시상대에서 금메달은 목에 걸었지만, 가슴의 일장기가 수치스러웠던 손기정은 그해 국가대표를 은퇴했고, 이듬해엔 아예 선수 생활을 마무리 지었습니다. 이후 후배 양성을 위해 힘썼어요. “1939년 ‘뛰어라 걸어라’ 캠페인을 열어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재능 있는 후배들을 발굴하고 가르쳐줬죠. 1945년 말에는 일제 치하에서 우리나라 마라톤을 이끈 인물들과 함께 ‘조선 마라톤 보급회’를 창설했어요. 여러 인재를 훈련시켰고, 그중 한 명인 서윤복 선수는 태극기를 가슴에 달고 1947년 보스턴마라톤대회에서 우승했죠. 할아버지는 1947년과 1950년 보스턴마라톤대회 감독, 1966년부터는 대한올림픽위원회 상임위원, 제5회 아시안게임 한국대표선수단 단장을 지내면서 우리나라 체육 발전에 힘썼죠. 1988년 서울올림픽에선 성화봉송 주자로 뛰셨어요. 한국 마라톤을 전 세계에 알린 공로를 인정받아 사후 국립대전현충원(제2국립묘지)에 안장됐으며 1970년 국민훈장 모란장, 2002년 체육 분야 최고 등급 훈장인 청룡장을 받았습니다.”

1947년 보스턴마라톤대회 우승(서윤복) 후 주미대사관을 방문한 손기정·서윤복·남승룡(왼쪽부터).

1947년 보스턴마라톤대회 우승(서윤복) 후 주미대사관을 방문한 손기정·서윤복·남승룡(왼쪽부터).

1986년 서독올림픽위원회로부터 청동투구를 돌려받은 손기정.

1986년 서독올림픽위원회로부터 청동투구를 돌려받은 손기정.

연우 학생기자가 “손기정기념관 외에 손기정 선수에 대해 알 수 있는 곳이 있는지” 궁금해했어요. “생가는 북한에 있고, 용산구에 할아버지가 사셨던 옛집이 있지만 지금은 일반인이 거주해요. 서울시와 논의해 옛집을 어떻게 보존할지 협의 중이죠. 손기정둘레길을 걸어보는 건 어떨까요. 지하철 충정로역 5번 출구에서 시작해 손기정기념관까지 이어지는 두 개 코스 총 1.2km의 길이죠. 특히 1코스에서는 할아버지 일생을 담은 벽화를 만날 수 있답니다. 기념재단은 2005년부터 매년 11월 잠실종합경기장 주경기장에서 '손기정평화마라톤'을 열고 있어요. 올해도 진행 예정인데요. 만 18세 이상 남녀 누구나 풀코스(42.195km)·하프·10km·5km 등에 참여할 수 있어요.”

기념관 2층에선 지난해 12월부터 손기정 탄생 110주년 기념 특별전 '다시 여는 축하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때 우리 국민들이 손기정을 축하할 수 없었던 순간을 현재에 다시 기뻐하도록 손기정 마라톤 영상·기념물들이 전시됐죠. 이곳에서 학생기자단은 조국을 위해 뛴 손기정에게 감사 편지를 썼습니다. “앞으로 손기정 선수가 어떻게 기억됐으면 좋겠나요?” 중근 학생모델이 물었어요. “사람들이 할아버지를 온전히 기억했으면 좋겠어요. 할아버지는 우리 민족에게 선물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암흑 같던 일제 강점기, 할아버지의 등장은 일제 억압으로 잃어가던 희망의 빛을 되살렸죠. 할아버지가 일제에 저항하면서 조국과 국민을 위해 뛰었던 순간을 잊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손기정기념관으로 가는 손기정둘레길

손기정기념관으로 가는 손기정둘레길

학생기자단 취재 후기

이번 취재를 다녀온 후 교육이 참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이번 취재에서는 손기정 선수에 대해 배웠는데요. 한국인 최초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라는 위대한 업적을 남겼는데도 우리는 손기정 선수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아요. 일제 강점기, 전 세계가 지켜보는 올림픽에서 정상에 오르는 게 대단한 일이란 걸 깨달았습니다. 소중 친구들도 손기정기념관에 와서 손기정 선수에 대해 알고, 일제가 얼마나 우리 민족에 간섭을 많이 했는지 알면 좋겠어요.

서연우(서울 월계초 5) 학생기자

지하철을 타고 충정로역 5번 출구에서 내려 손기정기념관으로 가는 길에 손기정 선수 생애를 다룬 벽화를 만날 수 있었어요. 그림을 보며 가다 보니 어느새 손기정기념관이 나왔죠. 기념관에서 이준승 관장님이 손기정 선수가 어떻게 마라톤을 시작하게 됐고, 베를린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게 됐는지 말씀해주셨습니다. 전시된 금메달과 월계관 등을 둘러보면서 일제 강점기 때 손기정 선수가 얼마나 민족의 자긍심을 높였는지 느꼈어요. 소중 독자들도 손기정기념관에 와서 애국심을 느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송중근(서울 강덕초 4) 학생모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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