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 가까이 윤석열 정부의 경제라인이 ‘가격 잡기’에 강공을 펼치고 있다. 금융을 시작으로 통신ㆍ정유ㆍ항공ㆍ주류까지 분야를 가리지 않는다. “은행은 국방보다 중요한 공공재적 시스템이다”라는 지난달 31일 윤석열 대통령 발언이 신호탄이었다. 이후 “은행의 영업 방식은 약탈적”(17일 이복현 금융감독원장), “세금 조금 올렸다고 주류 가격 올리나”(22일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금융ㆍ통신 분야 과점 구조가 고착화했다”(23일 한기정 공정거래위원장) 등 주요 경제부처 장관은 경쟁적으로 강경 발언을 쏟아냈다.
행동에도 나섰다. 26일 기획재정부ㆍ산업통상자원부 등 주요 경제부처에 따르면 정부는 정유사의 도매가 공개 범위를 확대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정유사가 대리점ㆍ주유소에 공급하는 휘발유ㆍ경유 등의 가격을 지역별로 구분해 공개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이를 통해 정유사 간 경쟁을 촉진해 석유제품 가격을 낮출 수 있다는 판단이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최근 소주ㆍ맥주 등의 가격 인상 움직임이 보이자 실태조사에도 착수했다. 가격 인상 요인과 주류업계의 동향은 물론이고, 필요하면 주류사의 이익 규모와 경쟁도까지 살펴보겠다는 입장이다. 주류세 상승분이 전체 원가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미미한데, 이를 빌미로 술값을 올리려는 움직임에 경고 메시지를 던진 것으로 풀이된다. 앞서 대한항공은 4월부터 마일리지 제도를 변경하기로 했지만 ‘소비자 혜택을 축소한다’는 정부ㆍ정치권의 비판에 결국 백기를 들었다.
이처럼 타깃은 다양하지만 정부가 내세우는 근거는 같다. 과점 체제인 이들 업계가 소비자 어려움은 나 몰라라 한 채 자신들 배만 불린다는 비판이다. 기업 자율, 시장 경제를 강조하던 윤 정부 출범 초기 때와는 논조가 확연히 달라졌다.
금리ㆍ요금ㆍ가격을 직접 억누르는 ‘강경책’으로 선회한 원인은 복합적이다. 우선 치솟은 물가ㆍ금리에 서민들의 부담이 가중되고 있다. 하지만 경기 침체와 부동산 경착륙 우려로 기준금리 인상이란 ‘정공법’을 쓰기 어려워졌다. 이에 시장의 기능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가격을 통제해 고물가 충격을 완화하겠다는 계산이다.
물가가 경기 악화를 부추기는 점도 감안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 물가 상승분을 뺀 실질 소득은 전년 동기 대비 1.1% 뒷걸음질 쳤다. 물가가 올라 가계의 소비 여력이 위축되고, 내수가 식어가는 악순환에 브레이크를 걸겠다는 것이다. 또 시장 논리에 따라 전기ㆍ가스요금을 대폭 올렸다가 연초 난방비 논란이 커졌던 학습효과도 이런 방향 전환에 한몫했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특히 정부 입장에선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지는 내년 4월 전까지 국면 전환이 필요한데 마땅한 카드가 보이지 않는다. 문재인 정부 때처럼 ‘퍼주기’식 추가경정예산을 당장 편성할 처지도 못 된다. 윤정부 들어 긴축 재정을 선언한 데다 높은 물가, 예년만 못한 세수 증가 폭 등 걸림돌이 한가득이라서다.
하지만 정부가 대안으로 선택한 전방위 가격 압박 정책이 효과를 내는 것은 제한적일 것이라는 비판이 적지 않다. 물가ㆍ금리로 대표되는 최근 비용 상승 문제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 미국 긴축 강화 등 외부 효과가 커서다. 금융당국은 지난해부터 금리 인상 억제책을 펼쳤지만 5대 시중은행의 예대금리 차이는 지난해 7월 1.1~1.36%포인트에서 올해 1월 1.33~1.81%포인트로 커졌다. 이 기간 기준금리가 워낙 가파르게 뛰어서다. 정부가 강조하는 통신ㆍ금융 등 과점 체계 해소도 마찬가지다. 중장기 과제로 당장 효과를 보기 어렵다.
업계의 반발도 커지고 있다. 정유업계에서는 “해외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규제”라는 비판이 나오고, 주류업계에서는 “각종 원부자잿값이 올라, 가격 인상이 필요하다”며 하소연한다.
강성진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우월적 지위에 따른 과점체제 안에서 돈을 쉽게 번다는 지적이 틀린 건 아니다”라면서도 “(경쟁 유도라는) 정부의 방향성은 적절하지만, 방법론에서 거칠었다”고 짚었다. 강 교수는 이어 “사회적 책임이란 측면에서 공감대를 형성하고, 그동안 독과점 때문에 자유를 누릴 수 없었던 쪽에 자유를 준다는 쪽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덧붙였다.
일각에선 2008년 이명박 정부 때의 ‘MB 물가’의 실패를 답습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당시 정부는 생활 밀접 품목 52개를 선정해 업계에 대한 전방위 압박을 가했지만 오히려 MB물가가 다른 품목보다 상승률이 더 높은 부작용이 나왔다. 이에 대해 기재부 고위 관계자는 “업계에 협조를 구하고 유통ㆍ가격 결정 구조를 살펴 비합리적인 부분이 있다면 최대한 조정하는 것이지 과거처럼 기업 ‘팔 비틀기’에 나서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공공요금 대응도 마찬가지다. 윤석열 대통령은 “공공요금은 최대한 상반기 동결 기조로 운영한다”고 했지만, 지난해 한국전력 적자는 32조6000억원, 한국가스공사 미수금은 8조6000억원으로 차올랐다. 천연가스 등 연료 수입을 위한 자금 조달까지 자칫 막힐 수 있는 경영 위기 상황이다. 요금 인상을 억지로 누를 여유가 사실상 없다.
양준석 가톨릭대 경제학과 교수는 “정치적인 압력을 가해 가격을 임시적으로 조절하면 반짝 효과만 날 뿐, 압력이 끝나면 다시 이전 수준 이상으로 오르게 된다”라며 “가격 기능은 되도록 시장에게 맡기되, 피해가 큰 사회적 약자에게는 지원은 늘리는 식의 입체적인 정책이 필요하다”라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