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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만 뛰면 뭐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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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승욱 기자 중앙일보 정치국제외교안보디렉터
서승욱 논설위원

서승욱 논설위원

"대통령만 열심히 뛰고 관료는 움직이지 않는다."

10여 일 전 저녁 식사를 함께한 여권 고위 인사가 자리에 앉자마자 이런 말을 툭 던졌다. 그는 '대통령실과 정부 내에 알 만한 사람은 아는 얘기'라며 관료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최신 에피소드를 들려줬다. 대략 이런 스토리였다. "6개월 전쯤 지방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주재하는 민생경제 대책회의가 열렸다. 수출 경쟁력 강화가 주요 테마 중 하나였다. 지역 내 주요 기업 관계자들도 참석해 수출과 경영 환경의 어려움을 호소했다. 그중 금속 제품을 만드는 수출 기업 대표가 재료 원산지와 수출국 표기와 관련한 애로를 토로했다. 장관 고시 정도만 고치면 되는 문제라 관련 부처에서 시정을 약속했는데 지금도 해결이 안 되고 있다. 부처 실무선에서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시간을 6개월이나 질질 끌었다고 한다."

지난해 8월 31일 경남 창원시 진해구 부산신항을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경제민생회의 참석에 앞서 항만물류 현장을 시찰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해 8월 31일 경남 창원시 진해구 부산신항을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경제민생회의 참석에 앞서 항만물류 현장을 시찰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는 "해당 부처도 뭔가 이유는 있겠지만, 어쨌든 대통령과 장관이 참석한 회의에서 이뤄진 약속인데 6개월이나 이행이 안 됐다면 말 다한 것 아니냐"며 "규제 개혁은 대통령이나 장관보다 결국 관료들이 움직이느냐에 달렸다"고 했다.

대통령 면전서 약속한 규제 개혁
6개월 지나도 부처선 시정 안 돼
관료 사회 쇄신 없이 개혁 어렵다

당시 브리핑 등에 따르면 대통령이 주재한 해당 회의의 테마는 '수출 경쟁력 강화'와 '해외 인프라 수주 활성화 전략'이었다. 수출 문제와 관련해 윤 대통령은 회의에서 "수출 기업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 "소관 부처들은 현장에서 우리 수출 기업의 어려움을 꼼꼼히 살펴 개선해 주실 것을 당부드린다"고 의욕을 보였다. 대통령이 열정을 드러낸 수출 경쟁력 회의, 여기서 분출된 기업의 민원까지 공무원의 서랍 속에서 6개월 동안 잠을 잤다면 다른 수출 기업이나 지방정부가 직면한 답답한 현실은 '안 봐도 비디오' 아닐까.

최근 만난 여당 소속 광역단체장은 "수도권이나 대기업들도 어려움은 있겠지만, 지자체와 기업의 손발을 묶는 각종 규제로 지방 경제는 정말 죽을 지경"이라고 했다. 지난 1월엔 김영환 충북지사가 '대통령님 저 정말 미치겠습니다'란 호소문을 페이스북에 올리기도 했다. 김 지사는 "규제 폭탄의 물벼락을 맞고 있는데 그냥 있을 수 없다. 머리띠를 두르고 오송과 청주비행장 활주로에 드러누울 생각을 하고 있다. 감방 갈 각오를 하고 있다”고 썼다.

요즘 윤 대통령의 국정 수행 지지율은 완만하지만 견고한 상승세를 보였다. 저질 담론과 윤핵관 논란 등 역대급 수준 미달 경쟁이 한창인 여당의 전당대회 상황을 고려하면 이례적인 흐름이다. 당 대표의 사법 리스크가 클라이맥스로 치닫는 파탄 직전 야당의 도움도 물론 없지는 않겠다. 하지만 "추진 방식엔 찬반이 있을지 몰라도 윤 대통령이 추구하는 국정 개혁의 방향 자체는 옳다"는 평가가 지지율 상승에 힘을 보태고 있다는 분석이 많다. 윤 대통령이 드라이브를 건 굵직한 이슈 중 규제 혁파 문제는 한국 경제의 체질 개선과 새 도약을 위해 피할 수 없는 사활적 과제다. 그리고 이 과제는 노동·교육·연금에 더해 윤 대통령이 '4대 개혁'으로 추진하겠다는 정부 개혁, 관료 사회의 총체적 쇄신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윤 대통령은 이달 초 "공직자들의 마인드가 바뀌지 않으면 경제 전쟁에서 살아남기 어렵다"며 민첩하고 유연한 정부로 거듭날 것을 주문했다. 또 민간 수준의 유연한 인사 시스템과 파격적인 성과주의 도입을 다짐했다. 누가 뭐라 해도 관료 사회 개혁은 일 안 하는 사람에게 벌을 주고, 일 잘하는 사람에게 상을 주는 간단한 원리에서 출발해야 한다. 대통령이 혼자 뛰어 이룰 수 있는 일은 없다. 대통령의 약속이 관료들의 서랍에서 6개월 동안 잠자지 않으려면, 도지사가 공항 활주로에 드러눕지 않으려면 고래를 춤추게 하듯 관료들을 움직여야 한다. 대한민국 1호 영업사원이자 최고경영자인 윤 대통령의 어깨가 그래서 더 무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