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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에버라드 칼럼

북한의 도발 위험성 키우는 식량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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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존 에버라드 전 평양 주재 영국대사

존 에버라드 전 평양 주재 영국대사

1990년대 북한의 대기근 여파를 직접 목격한 건 지난 2007년 함흥에 갔을 때다. 평양을 처음으로 벗어나 함흥 거리에서 본 사람들은 평양 시민보다 훨씬 작고 깡마른 체형에 수척하고 누렇게 뜬 얼굴이었다. 치마를 입은 여성의 다리는 쇠꼬챙이처럼 가늘었다. 1990년대에 태어나 어린 시절에 대기근을 겪고 살아남았지만 영양실조와 발육 부진을 겪은 이들은 제대로 된 삶을 영위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기근은 이처럼 참혹하다. 전문가들은 또다시 대기근의 그림자가 북한에 어른거린다고 경고한다. 북한 정권도 이를 인지하고 있었던 듯하다. 2021년 4월부터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노동당 세포비서 대회를 통해 또 다른 고난의 행군을 경고했다. 같은 해 6월에는 제3차 노동당 전원회의에서 식량 위기를, 그해 12월에는 노동당 중앙위원회에서 식량 안보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런데도 상황은 악화했다. 대한민국 농촌진흥청의 2022년 12월 자료에 따르면 북한의 2022년 식량 작물 생산량이 전년보다 18만t 줄었다.

기본적인 수요조차 충족 못 시켜
김정은 또 다른 고난의 행군 경고
민심 동요하면 도발 나설 위험성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상황은 올해 들어 기본적인 수요조차 충족하지 못할 만큼 악화한 것 같다. 식량 부족으로 북한의 기본 식품의 가격이 달러화 기준 남한보다 훨씬 비싸졌다. 남북한 기본 소득 격차를 볼 때 얼마나 상황이 심각한지 알 수 있다. 식량 배급 자체가 공평하게 이뤄지지 않으면서 북한 내 지역에 따른 식량 가격 차이가 크게 벌어졌다. 지금 상태가 이어진다면 최악의 기아 사태로 갈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경고한다.

식량난이 심각한 것은 정치적인 여파가 크기 때문이다. 90년대 대기근으로 북한 주민의 지도부에 대한 신뢰가 크게 흔들렸다. 민심이 동요해 탈북자가 줄을 이었고, 북한 정권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다는 불만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만약 기아가 북한을 다시 덮친다면 정권에 대한 주민의 믿음이 두 번째로 붕괴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김정은 위원장은 첫 연설에서 다시는 고난의 행군이 없을 것이라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다시 기아가 발생한다면 이는 김 위원장의 약속을 철석같이 믿었던 이들의 믿음을 짓밟게 될 것이다. 약속이 지켜지지 않은 책임도 김 위원장이 지게 될 것이다.

북한이 세계식량계획에 식량 원조를 요청했지만, 북한 내부 모니터링이 허용되지 않으면 원조에 응할 리가 없다. 중국도 코로나 이후 국경 재개방으로 식량 수급에 어려움을 겪고 있어 지원이 불확실하다. 북한 정권이 손 쓰기엔 이미 너무 늦은 재난이 코앞에 닥쳤을 수도 있다.

기아가 다시 닥친다면 정권에 대한 강한 반발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1992년 불만에 찬 군 장교들이 열병식에서 탱크 포탄을 쏴 지도부 전체를 사살하려 했던 시도가 있었던 것처럼 이번에도 그러지 않으란 법이 없다. 집단농장에서 식량 빼돌리기가 성행하고,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비공식적인 무역활동을 하는 데 힘을 쏟을 것이다. 이는 곧 이미 맥박이 희미해진 북한 당 조직의 기능이 멈출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렇게 되면 고위급 당 지도부의 일부 지역 방문 자체가 위험해질 수도 있다.

기아만 문제가 아니다. 코로나 위기가 여전한 가운데 북한이 지난 18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로 도발했지만, 한·미 군사훈련을 저지하지 못한 데 따른 불안감이 팽배할 것이다. 지난해 10월 김 위원장은 또 다른 호위대를 창설했고, 한국 문화의 잠식을 막기 위한 노력을 배가하고 있다.

안 그래도 다루기 힘든 상대인 북한은 더욱 까다로워질 것이다. 지금처럼 정권이 위협을 받으면 본능적으로 안으로 숨어들고 외부와의 접촉을 끊기 때문이다. 지난 19일 김여정 부부장은 그 어떤 대화도 할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밝혔다.

북한 정권의 행동도 변덕이 죽 끓듯 하고 있다. 김 위원장의 어린 딸을 전면에 내 세우고 얼굴을 넣은 우표를 만든 행동은 기이하다. 김 위원장이 김정일 기일(12월 17일)과 생일(2월 16일)에 금수산 태양궁전에 가지 않는 것도 매우 이상하다. 규칙·전통·예측가능성에 모든 것을 의지하고 있는 북한 정치 체제에서 이러한 행동은 정권 유지에 필수적인 군 간부의 충성심을 흔들어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불안한 시기야말로 북한 정권이 무언가 어리석은 짓을 할 수 있는 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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