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병주 논설위원
정치가 넘쳐서일까. 얼마 전 서울 중구 태평로에서 활쏘기 행사가 열렸다. 현 정권에 대한 적개심을 앞세워 집회를 이어가고 있는 단체들이 윤석열 대통령 부부와 한동훈 법무부 장관의 얼굴 사진을 붙인 인형들을 과녁으로 만들어 초등학생에게 활을 넘겨줬다. ‘난방비 폭탄, 전쟁 위기, 깡패 정치, 친일 매국 윤석열에 활쏘기’라는 현수막도 보였다. 장난감 활이었지만 활 쏘는 장면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리고 선전했다. 비판이 일자 “장난감 활쏘기는 명예훼손이 될 수 없다”는 논평을 냈다. 1주일 후 이어진 집회에는 ‘윤석열 샌드백’이 등장했다.
국민의힘에서는 “어린이에게 저주와 패륜, 폭력을 가르친다”(양금희 수석대변인)는 비판이 나오고, 보수단체는 발끈하며 행사를 주최한 단체를 경찰에 고발했다. 이종배 국민의힘 서울시의원은 “정체성이 확립되지 않은 어린이에게 얼굴을 향해 활을 쏘게 하는 행위는 끔찍한 아동학대”라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제기했다.

지난 11일 주말 서울 도심에서 열린 진보 성향 시민단체 집회에서 윤석열 대통령 부부와 한동훈 법무부 장관의 사진을 향해 장난감 활을 쏘는 부스가 설치됐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논란이 일었다. 사진 윤상현 국민의힘 의원 페이스북 캡처=연합뉴스
헌법에서 보장하는 집회ㆍ결사ㆍ표현의 자유로 봐야 한다는 반박도 있다. 지난해 가을 ‘부천 국제만화축제’에 전시된 전국학생만화공모전 금상 수상작 ‘윤석열차’와 2019년 단국대 천안캠퍼스에 붙었던 문재인 당시 대통령 비판 대자보 사건은 같은 논란이 일었지만 표현의 자유라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윤석열 과녁 쏘기 놀이 역시 표현의 자유 제한 조건이 되는 명예훼손이 어느 정도인지에 대한 수사당국 혹은 법원의 판단이 뒤따르겠지만 어린이들까지 어른들 정치 싸움에 동원하는 게 적절한지 질문이 남는다.
한국 사회는 남북분단 상황의 특수성을 중심으로 각종 경제ㆍ사회적 이슈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이를 단순히 흑백 논리로 재단해 아이들을 반정부적 활동에 참여시키는 사례가 종종 목격됐다. 2008년 광화문 일대를 중심으로 벌어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시위에서 “싼 쇠고기는 이명박 너나 먹어라”고 외친 초등학생에겐 어떤 진실이 각인된 것이었을까. ‘한국인이 광우병 쇠고기를 섭취할 경우 인간광우병에 걸릴 위험성이 94%나 된다’는 허위사실(대법원 2011년 정정보도 판결)을 앞세운 MBC ‘PD수첩’의 방송 내용이 검증되기 전이었다. 대법원이 공직자에 대한 명예훼손 혐의를 무죄로 판단했다고 해서 ‘PD수첩’의 보도 행태와 이를 활용한 행위가 정당화할 순 없다. 교사 말을 듣고 교사와 함께 집회에 참여한, 몸과 마음이 훌쩍 커버린 학생들은 ‘정정 교육’이라도 받았을까.
정권 증오 놀이에 아이들 참여
시위 단상 발언에 반미 공연도
진실 왜곡된 확신 심어줄 우려
2019년 가을 서울 서초동 거리를 달궜던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지지 집회도 비슷했다. ‘우리가 조국이다’ ‘정치검찰 OUT!’이 적힌 피켓을 손에 쥐고 “조국 수호”를 외치는 아이들이 카메라에 잡혔고, “(윤석열) 총장님, 쬐끄만 게 까분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다. 하지만 총장님이 법무부 장관입니까?”라는 초등학생의 단상 발언에 환호가 이어졌다. 이 아이들의 부모와 주최 측 인사들, 환호했던 이들은 조국 전 장관 사건과 관련해 이어지는 유죄판결을 접하며 아직도 아이들의 발언을 자랑스러워할까.
사상 선전에 초등학생을 동원해 공연하는 현장도 있었다. 2019년 광복절을 앞두고 옛 통합진보당(2014년 헌법재판소 위헌정당 해산 결정) 출신이 주축인 민중당 등 50여개 단체 연합체인 ‘민중공동행동’이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반일ㆍ반미 시위에 어린이 공연단을 무대에 올렸다. 만화영화 ‘아기공룡 둘리’ ‘뽀로로’ 주제곡과 동요들을 개사했는데 “일본 손 잡고 미국 섬기는 매국노 자한당(자유한국당) 후후 불어서 저 바다 건너서 섬나라 보내자”와 같은 내용이 담겼다. 이 공연은 유튜브에서도 공개됐다. 아이들에게 비판의식을 길러주겠다는 취지라는 항변도 있다. 3ㆍ1운동이나 4ㆍ19혁명과 같은 경우에도 초등생들까지 나섰는데 무엇이 문제냐는 식이다. 일제와 독재정권이라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세력과 현 정권을 동일 선상에 놓겠다는 말로 들린다.
정보기술(IT) 발달 영향으로 아이들은 여과 없이 쏟아지는 혐오 발언들과 가짜뉴스, 그리고 유사언론의 황색뉴스에 노출돼 있다. 이런 상황에서 성인들마저 진실을 분간하기 힘든 정치적ㆍ사상적 다툼의 현장 참여는 아이들에게 혼란을 넘어 왜곡된 확신을 심어줄 가능성이 크다. 형사처벌을 면제받는 나이(현재 만 14세 미만)를 법률로 규정한 것도 넓게는 판단력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시기까지 아이들을 보호하자는 취지로 읽힌다. 정치 과잉의 시대일수록 아이들을 증오와 혐오에 찬 현장에서 한 발 떨어진 곳에 둘 수 있는 어른들의 자제력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