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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시조 백일장-2월 수상작] ‘차갑게 얼린 시간’에 담은 사랑, 표현 돋보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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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장원

눈사람

눈사람

눈, 사람
문영

차갑게 얼려둔 시간의 틀 안에
잊기엔 아쉬운 당신을 담았다
한겨울 눈사람처럼
영하로 묶어두고

온몸으로 막아둔 기억의 틈 사이로
슬금슬금 빠져나간 내가 알던 당신이
봄날에 녹아내릴까
냉동고를 꽉 닫는다

◆문영

문영

문영

제주 출생.
2019년 제주시조백일장 차하.
제주시조시인협회 회원.
초승문학 동인.

차상

이명(耳鳴)
김은생

귀 막아도 들린다 공명으로 전하는

기차 소리 파도 소리 혼미하다 바람 소리
우물가 쌀 씻는 소리 알 수 없는 난수표다

난수표 주워들고 해독하려 애를 써도
한 생을 살아가며 남모르게 엉킨 타래

끝끝내 풀지도 못하고 요동치는 주파수

차하

손톱 그 후
김보선

구멍 난 장갑 사이 빠져나온 아버지 손톱
황금빛을 향해서 시간을 걸어둬도
제대로 자라지 못해 물집만 불거져

허공에 코를 꿰인 채 앙상한 꿈을 꾼다
더는 내려갈 수 없는 무게를 묶어놓고
당신은 흑태의 삶을 몇 번씩 넘긴다

켜켜이 쌓여가는 칼바람 덕장에서
기다림은 숨죽여 바람을 맞는 동안
온몸은 뼈만 남아서 누렇게 익어간다

이달의 심사평 

새해의 결심이 조금 수그러드는 즈음이 2월이 아닌가 싶다. 그럼에도 중앙시조백일장의 문을 두드리는 분들은 시조 창작이라는 결심의 날을 잘 벼리고 있을 것으로 믿으며 응모작을 열었다.

이번 달 장원의 자리에는 문영의 ‘눈, 사람’을 앉힌다. 유한과 소멸의 속성을 지닌 사랑의 감정을 영원성으로의 갈망으로 잘 전개하였다. 특히 “차갑게 얼려둔 시간의 틀” 같은 구체어와 관념어를 조합한 표현이 돋보였다. 또한 제목에 쉼표를 찍음으로써 시적 대상의 확장을 시도하여, ‘눈’과 ‘사람’에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 것도 좋은 발상이라고 보았다. 다만 첫 시작의 빼어난 묘사 이후로 다소 쉽게 풀려버린 듯한 느슨한 진술이 아쉽다.

차상은 김은생의 ‘이명(耳鳴)’이다. “알 수 없는 난수표”이자 “요동치는 주파수다”인 이명을 “우물가 쌀 씻는 소리”로 참신하게 표현한 것은 상투화된 비유에서 벗어나 또 다른 낯선 비유로 새롭게 다가오게 한다. ‘이명’이라는 현상 그 자체에 대한 묘사와 진술을 넘어 내면화로 확장하고 심화시킨다면 완성도가 더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첫째 수 중장 전구(前句)의 반복과 후구의 도치법의 연결이 자연스럽지 않은 점, 한 장(章)에 같은 길이의 음보를 배치한 점 등을 한 번 돌아보기를 바란다.

차하로는  김보선의 ‘손톱 그 후’를 선했다. 바람 부는 덕장에서 평생을 보낸 아버지의 “흑태”같이 고단한 삶을 진정성 있게 그려냄으로써 공감력을 얻고 있다. 특히 둘째 수 중장과 종장은 시 전체의 무게가 실리는 중심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다. 한 가지 아쉽다면 아버지의 손톱에서 시작된 시적 발화를 끝까지 치밀하게 밀고 나가지 못한 점이다.

시조는 정형 미학의 완결을 지향하는 장르인 만큼 구와 구, 장과 장, 수와 수의 연결이 매우 유기적으로 작용하여야 한다는 점을 명심하였으면 한다. 이정순, 한명희의 작품을 눈여겨보았음을 밝히며 응모한 모든 분의 분발을 빈다.

심사위원 서숙희(대표집필)·정혜숙

초대시조 

바람의 날 · 4  -억새
김윤숙

우, 우, 우 이명의
울음을 삼킨 들녘

한번 더 받들어야 할
돌투성이 자갈밭

닳아져 벼리던 날들

푸르게 살아,
살아 있으라

◆김윤숙

김윤숙

김윤숙

2000년 열린시학 등단. 시집 『가시낭꽃 바다』, 『장미연못』, 『참빛살나무 근처』, 현대시조100인선 『봄은 집을 멀리 돌아가게 하고』. 시조시학상 등 수상.

제주의 바다가 만들어내는 해안가 풍경을 삭제시키면 또 다른 고색창연한 들녘 풍경을 만날 수 있다. 바람에 온몸을 내맡기며 “우, 우, 우” 소리를 내는 억새군락이다. 태어날 때부터 제주 사람인 시인은 바람과 억새가 만들어내는 그 소리가 예사롭지 않았을 것이다. 그 소리는 시인의 가슴을 파고들어 통한의 “울음을 삼킨 들녘”으로 구체화된다. 그것은 미루어 짐작건대 4·3을 겪은 무고한 양민들의 넋두리가 아니었을까. 그때 얼마나 많은 억울한 죽음들이 제주의 들녘을 물들였을지 우리는 알고 있다. 누군가 직접 들려주지 않아도 제주 시인들의 작품 속에 고스란히 녹아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작품 속에는 어느 것을 읽어도 4·3의 슬픔과 비애가 묻어있다. 그들의 언어에는 비극성이 내포되어 있으며 죽음과 강한 생명력을 끌어안고 있다. 결코 잊어서는 안 될 4·3이 바람과 억새가 들려주는 역사적 의미로 이 작품 속에 생생하게 살아있다.

시인은 종장의 “푸르게 살아,/살아 있으라”고 주술의 힘을 빌린 시적 염원을 이 작품 속에 불어 넣고 있는 것이다. 단 한마디도 4·3이라는 말이 들어있지 않지만 “돌투성이 자갈밭”이 “닳아져 벼리던 날들”을 기억하며 “살아, 살아 있으라”고, 그래서 4·3의 의미가 퇴색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제주의 바람과 억새, 돌이 갖는 시청각적 이미지가 빛나는 시조다. 4·3 문학의 한 맥락으로 읽히는 이 한편의 단시조를 천천히 음미해 보는 아침이다.

손영희 시조시인

◆응모안내

매달 20일까지 e메일(j.sijo@joongang.co.kr) 또는 우편(서울시 마포구 상암산로 48-6 중앙일보 중앙시조백일장 담당자 앞)으로 접수할 수 있습니다. 등단하지 않은 분이어야 하며  3편 이상, 5편 이하로 응모할 수 있습니다. 02-751-5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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