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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 데뷔 정재일 “25년간 음악으로 통·번역, 이번엔 제 얘기 들어주세요”

중앙일보

입력

데카 데뷔앨범 ‘리슨(Listen)’을 발매한 정재일이 24일 서울 JCC아트센터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질문에 답하고 있다.  사진 유니버설 뮤직

데카 데뷔앨범 ‘리슨(Listen)’을 발매한 정재일이 24일 서울 JCC아트센터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질문에 답하고 있다. 사진 유니버설 뮤직

영화 ‘기생충’과 넷플릭스 ‘오징어게임’의 음악감독 정재일(40)이 유니버설뮤직 산하 유명 클래식 레이블 데카(Decca)에서 데뷔앨범 ‘리슨(Listen)’을 발매했다.
24일 서울 JCC아트센터에서 기자들과 만난 정재일은 "앨범 ‘눈물꽃’을 발표했던 2004년이 떠오른다"고 했다.

데카 데뷔앨범 ‘리슨(Listen)’ 24일 발매 #오슬로 레인보우 스튜디오에서 녹음 #“지구 이야기 못들어 팬데믹·전쟁 겪어”

“그때 싱어송라이터의 꿈을 접고 ‘싱어송’은 안 되지만 ‘라이터’를 해볼까 생각했었습니다. 20년 동안 쌓아온 경험을 바탕으로 데카에서 음악만을 위한 음악을 해보고 싶습니다.”

정재일은 장르를 넘나드는 연주가이자 작곡가다. 17세 때 베이시스트로 밴드 ‘긱스’에 참여한 그는 패닉·박효신·아이유의 작곡과 프로듀싱을 맡았고, 영화 ‘기생충’, ‘옥자’, ‘브로커’ 등의 음악을 담당했다. ‘오징어 게임’으로 미국 할리우드 뮤직 인 미디어 어워즈에서 한국인 최초로 수상했다.

데카 데뷔앨범 ‘리슨(Listen)’을 발매한 정재일이 24일 서울 JCC아트센터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피아노 연주를 하고 있다. 사진 유니버설 뮤직

데카 데뷔앨범 ‘리슨(Listen)’을 발매한 정재일이 24일 서울 JCC아트센터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피아노 연주를 하고 있다. 사진 유니버설 뮤직

“영화광이라 영화관에서 살다시피 하며 온갖 이상한 영화와 음악을 찾아 보고 들었어요. 비올레타 파라의 ‘그라시아스 아 라 비다’처럼 슬픔 안에 웃음이 있는 음악이 10대와 20대를 지배했죠. 그때 학습하고 느꼈던 것들을 밑천 삼아 살고 있는 듯해요.”

데카 데뷔앨범 ‘리슨’의 중심은 피아노다. 정재일은 “피아노는 저의 모국어다. 말 하는 것보다 피아노로 연주하는 게 더 편하다”고 했다. 깊은 이야기를 하기 위해 큰 편성보다 오롯이 혼자 얘기할 수 있는 방식을 택했다는 설명이다.

‘리슨’에서 정재일은 자신의 분신과 같은 피아노로 자연을 보는 시선을 들려준다. 청아하면서 진중한 피아노 소리가 인상 깊게 다가온다. 노르웨이 오슬로의 레인보우 스튜디오에서 녹음했다. ECM레이블을 비롯해 수천 장의 명반이 탄생한 명소로 빼어난 자연환경 속에 위치해 있다.

"수석 엔지니어인 마르틴 아브라함센이 저를 위해 시간을 빼줬어요. 거기 머물면서 하루 일곱 시간씩 열흘 동안 녹음했습니다."

음반 커버에는 파도치는 밤바다가 담겼다. 오래 협업해온 장민승 작가의 사진이다.

앨범에 담긴 여섯 곡을 들어보면 간명하지만 감정의 온도가 변하며 긴장을 불러일으킨다. 겉으로는 평온하지만 내면에선 요동치는 그의 영화음악과 닮아있다. 13일 선공개된 '더 리버(The River)'는 잔잔하게 여울지며 듣다 보면 조금씩 깊이 파고 들어가는 곡이다.

“제가 한강 하구에 사는데 겨울엔 철새가 오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죠. 습지와 갈대가 있고 고수부지가 있는 풍경이 떠올랐어요. 사람이 만들어놓은 것만 없으면 너무나 아름답겠구나, 작은 물줄기에서 바다까지 어떻게 가지? 여러 복잡한 생각 속에 가라앉는 느낌을 포착해서 썼습니다.”

지난 24일 데카 데뷔앨범 ‘리슨(Listen)’을 발매한 연주가 겸 작곡가 정재일.  사진 유니버설 뮤직

지난 24일 데카 데뷔앨범 ‘리슨(Listen)’을 발매한 연주가 겸 작곡가 정재일. 사진 유니버설 뮤직

이어지는 ‘리슨(Listen)’은 데이비드 란츠를 연상시키지만 가슴을 철렁하게 하며 슬픔을 자아낸다. ‘오션 미츠 더 랜드(Ocean Meets The Land)’는 바그너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선율이 떠오른다. 어둡고 묵직했던 곡은 이내 가면을 벗고 신선한 공기를 쐬는 것처럼 희망에 도달한다.
‘앵성디스(Incendies)’는 간명한 선율이 불러일으키는 심상이 비범하다. 마지막곡 두 곡은 ‘마비’를 뜻하는 ‘애네스씨지아(Anesthesia)’와 ‘미학’을 뜻하는 ‘에스씨지아(Esthesia)’를 나란히 대비시켰다.
“미(美)의 반대는 추함이 아니라 느낄 수 없는 거래요. 어짊의 반대가 모짊이듯이요. 열린 마음으로 살아봐야죠. 지구가 하는 말을 못 들어서 팬데믹과 전쟁을 겪고 있구나, 이런 느낌이 떠올랐어요.”

음반에서 인상적인 현악 사운드는 부다페스트 스코어링 오케스트라의 연주다. ‘기생충’, ‘옥자’, 앨범 '시편' 작업에 이어 이번에도 참가했다. 그는 절실함과 근면함이 오늘의 자신으로 이끌었다고 했다.

“기회를 잡고자 하는 절실함이 있었고요. 예술가들에게 결여될 수도 있는 근면함이나 책임감으로 25년 넘게 무대 뒤에서 서포트 했습니다. 음악을 통한 통·번역가라고 할까요. 그게 제 삶이고 익숙한 제 하루입니다. '오징어게임'으로 명예를 얻었지만 기본적인 삶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정재일은 류이치 사카모토, 케틸 비외른스타드 등 수많은 장르의 음악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지만 클래식 음악만 국한해 보면 모차르트 ‘레퀴엠’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라벨, 드뷔시로부터 영향을 받았고, 아르보 패르트의 구도자적인 음악과 진중한 삶에 10대 시절부터 경도됐어요. 펜데레츠키 ‘히로시마 희생자들에게 바치는 애가’를 듣고 충격에 빠졌었죠. 루치아노 베리오, 토마스 아데스, 진은숙 선생님 등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습니다.”

서울시향 신임 음악감독 야프 판 즈베던이 "정재일과 꼭 작업하고 싶다"고 한 데 대해 그는 “거장이 제 이름을 불러주셔서 황송했다”며 “그분들이 생각하는 예술적인 경지에 맞출 수 있을지 두렵기도 하지만 해보고 싶은 작은 소망이 있다”고 말했다.

류태형 객원기자·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 ryu.taeh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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