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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프리즘] 쓴소리 비서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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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8호 30면

박신홍 정치에디터

박신홍 정치에디터

프로야구 LG 트윈스의 새 사령탑을 맡은 염경엽 감독은 자신을 바로 곁에서 보좌할 수석코치에 한 번도 같이 일한 적 없는 김정준 코치를 깜짝 임명했다. 넥센·SK 감독 시절 우승 목전에서 번번이 주저앉은 이유를 되짚어본 결과 ‘내 판단과 결정이 곧 진리’라는 교만에 빠져 있었음을 깨달았다면서다. 그래서 이번엔 자신의 수족 역할을 할 ‘심기 경호형 참모’ 대신 잘못된 판단을 내릴 때 주저 없이 직언할 수 있고 때론 격렬한 논쟁도 마다하지 않을 ‘쓴소리 수석코치’를 백방으로 수소문했다고 한다.

이승엽 감독과 박진만 감독도 선배인 김한수와 이병규를 수석코치로 ‘모시는’ 파격으로 화제를 모았다. 둘 다 한국 야구의 대표 스타지만 감독으론 초보라는 현실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며 조언도 아끼지 않을 선배를 삼고초려해 영입한 거였다. 한국 야구계는 선후배 위계질서가 그 어느 분야보다 강한 곳이다. 그 속에서 감독은 절대 권력을 가진 일인자로 통한다. 심지어 외국인 선수도 한국 야구에 적응하려면 선후배 문화부터 배워야 한다는 게 불문율이다. 그런데 이런 야구계조차 기존의 관습을 뛰어넘기 시작했다는 건 그만큼 시대가 변했다는 방증일 터다.

직언해줄 사람 한 명 없는 리더는
브레이크 없는 차와 다를 게 없어

한국의 정치는 어떤가. 사실 지난해에도 ‘신선한’ 소식이 하나 전해지긴 했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장성민 정무특보를 임명하자 김은혜 대변인은 그를 ‘쓴소리 특보’라 칭했다. “우리도 이제 쓴소리 전담자를 곁에 두는 대통령을 보게 됐구나”라는 호평도 나왔다. 하지만 이후 ‘윤심’ 논란만 가중됐을 뿐 쓴소리 특보가 쓴소리했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여야 정치권도 마찬가지여서 줄 세우기 고질병에 쓴소리하는 자는 출당시키라는 주장까지 나오는 실정이다. 쓴 약이 몸에 좋다는 말이 적어도 용산과 여의도에서는 발붙일 틈이 없는 모습이다.

하지만 서 있는 자리가 다르면 보이는 것도 다르기 마련이다. 야구도 더그아웃에 있는 감독보다 TV나 관중석에서 운동장 전체를 보는 팬들이 상황을 더 잘 파악할 때가 많다. 바둑도 옆에 있는 훈수꾼이 수를 더 잘 읽곤 하지 않나. 어느 조직이든 운전대를 잡은 자는 눈앞에 보이는 게 전부라 착각하고 자기 뜻대로만 밀어붙이기 쉽지만 그럴수록 “이 길이 아니요”라고 직언할 사람이 꼭 필요한 법이다. 새가 좌우 날개로 날듯 자동차도 액셀만 있고 브레이크가 없으면 폭주 끝에 대형사고로 이어지기 십상인 것과 같은 이치다.

조직의 리더가 빨리 성과를 내고 싶은 건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빨리 가는 것보다 중요한 건 똑바로 가는 거다. 시속 100㎞지만 옆으로 가는 차와 시속 20㎞지만 앞으로 가는 차 중 누가 먼저 결승 테이프를 끊겠는가. 너무 간단한 이치 아닌가. 지도자를 믿고 열심히 쫓아갔는데 엉뚱한 곳에 가 있으면 지지자들이 얼마나 허탈하겠는가. 그런데도 한국 사회 곳곳의 리더들은 여전히 내가 가는 길이 옳은 길이란 자만심에 충만해 쓴소리는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 게 현실 아닌가.

정치권도 내년 총선을 앞두고 전열 재정비에 나선 지금이 오히려 기회다. 일편단심 윤심과 명심을 외쳐 봤자 민심이 꿈쩍이나 하겠는가. 대신 대통령실이든 여야 대표실이든 각계 전문가뿐 아니라 시장 상인과 평범한 회사원, 가정주부 등 장삼이사들을 ‘쓴소리 비서관’으로 위촉해 보라. 특별보좌관도 좋고 자문위원이라 해도 상관없다. 그리고 취합된 쓴소리는 모두 들은 그대로 공개해 보라. 이런 모습만 보여도 지지율이 금세 상향 곡선을 그릴 거다.

『정관정요』에서 위징은 “군주가 영명한 건 널리 듣기 때문이며 어리석은 건 편협하기 때문”이라 했다. 이젠 한국 정치도 나만 옳고 나만 따르라는 ‘통치(統治)’의 구습에서 벗어나 민심의 쓴소리를 겸허히 받드는 ‘정치(政治)’를 복원해야 할 때다. 이게 진정 국민이 바라는 ‘정치(正治)’로 나아가는 길이다.

박신홍 정치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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