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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기억] 우수와 경칩 사이, 봄이 오는 소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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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8호 31면

‘빨래’, 전북 고창, 1977년. ⓒ김녕만

‘빨래’, 전북 고창, 1977년. ⓒ김녕만

꽁꽁 얼었던 냇물이 드디어 풀렸다. 아직 여기저기 천변에 잔설이 남아 있긴 하지만 두껍게 얼었던 얼음이 녹으면서 냇가엔 봄기운이 가득하다. 겨우내 빙판에서 시끌벅적하던 동네 개구쟁이들이 사라지고 졸졸졸 냇물이 즐겁게 소리 내어 흐르자 때를 만난 오리들이 떼를 지어 봄 마중을 나왔다. 마침 동네 아주머니도 한겨울 묵은 때를 빨래하러 나온 참이다.

봄은 소리의 계절이다. 얼음장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냇물은 노래를 부르고 오리들이 꽥꽥거리며 물장구치고 빨랫방망이 소리가 경쾌하다. 조용히 귀 기울이면 톡톡, 단단한 껍질을 뚫고 새순이 돋는 소리도 들릴 것 같다. 눈이 녹아 비가 된다는 우수(雨水)가 지났으니 봄이다. 겨울잠을 자던 개구리도, 집안에서 웅크리고 있던 가축들도, 시냇가 버들개지도, 모두 모두 밖으로 뛰쳐나올 기세다. 오랫동안 참을 만큼 참았으니 긴 겨울 인내했던 것들이 해방을 구가할 때가 되었다.

예전에 냇가 빨래터는 집안일에 묶여 종종거리느라 좀처럼 외출이 어려운 어머니들의 해방공간이었다. 빨래가 담긴 대야를 머리에 이고 빨래터에 나오면 하나둘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빨래 두드리는 방망이 소리가 요란하게 리듬을 타고 울렸다. 그 소리 사이로 어머니들의 수다와 웃음소리가 높아지면서 빨래터엔 화색이 돌았다. 서로서로 자랑 아닌 자랑, 흉 아닌 흉을 끝없이 늘어놓으면서 집집마다 그간의 사정과 형편이 공유되며 이웃사촌의 정이 더욱 끈끈해졌다.

그러고 보니 사진 속 아주머니가 두드리는 빨랫방망이 소리는 빨래터 친구들을 불러내는 신호일지 모르겠다. 아직 물이 차갑긴 하지만 그래도 이제 할 만하다고, 어서 나와 밀린 이야기를 나누자고 이웃을 부르는 소리 말이다. 봄은 색깔의 계절이라고 하지만 아무래도 소리가 먼저인 것 같다. 특히 농촌에선 그랬다. 음력 정월이 가고 2월이 오면 벌써 들로 나갈 준비가 시작되면서 겨울을 툭툭 털어내는 소리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오곤 했다.

김녕만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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