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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 “린뱌오 끝까지 추적해라” 미군 수송기 행적에 촉각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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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8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64〉

태평양전쟁 기간, 버마 파견군 시절의 두위밍(오른쪽 첫째). 왼쪽 첫째는 윈난성 주석 룽윈. [사진 김명호]

태평양전쟁 기간, 버마 파견군 시절의 두위밍(오른쪽 첫째). 왼쪽 첫째는 윈난성 주석 룽윈. [사진 김명호]

중·일 전쟁 시절(1937~1945), 중공은 타이항산(太行山) 자락에 북방국과 팔로군(八路軍) 사령부 간판을 내걸었다. 거리는 중앙 근거지 옌안(延安)에서 약 800㎞였다. 중간에 천험(天險)의 황하와 황토고원지대는 물론 일본군 점령지역이 허다했다. 한 번 가려면 1개월도 부족했다. 일본이 백기를 들자 팔로군 참모장 예젠잉(葉劍英·엽검영)이 옌안에 상주하던 미군 측에 항공기 대여를 요청했다. 당시 옌안에는 일주일에 한 번씩 시안(西安)을 오가는 C-46 미군 수송기가 있었다.

마오쩌둥은 착륙지점을 고심했다. 몇 차례 변덕을 거쳐 산시(山西)성 리청(黎成)의 장닝춘(長寧村)을 선택했다. 보안을 위해 이륙 전날 심야에 탑승 인원을 미군 측에 알려줬다. 군사위원회비서장 양상쿤(楊尙昆·양상곤)과 예젠잉을 비행장에 파견해 안전검사도 철저히 했다. 8월 25일 새벽, 낙하산 착용에 무기까지 휴대한 린뱌오(林彪·임표), 류보청(劉伯承·유백승), 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 천이(陳毅·진의), 사오징광(蕭勁光·소경광), 천껑(陳賡·진갱), 쑹스룬(宋時輪·송시륜), 덩화(鄧華·등화), 양더즈(楊得志·양득지), 황화(黃華·황화) 등 중공 군·정요원 21명이 공항에 도착했다. 남편과 함께 전송 나온 양상쿤의 부인이 기념촬영을 제의하자 천이가 수다를 떨었다. “낙하산을 멘 모습들이 가관이다. 비행기가 추락하면 우리 추도식에 사용해라.”

훗날 ‘신중국 개국 원수’ 3명 등 탑승

동북 도착 후 첫 번째 회의를 주재하는 린뱌오. [사진 김명호]

동북 도착 후 첫 번째 회의를 주재하는 린뱌오. [사진 김명호]

훗날의 ‘신중국 개국 원수’ 3명과 10여명의 장군, 정계 요인이 탑승한 비행기 안은 떠들썩했다. 린뱌오만은 예외였다. 목적지 착륙까지 4시간 동안 말 한마디 없이 창밖만 응시했다. 천이가 덩샤오핑에게 린을 손짓하며 낄낄거렸다. “저 머릿속에 뭐가 들어 있는지 궁금하다.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다.”

충칭(重慶)에 있던 장제스(蔣介石·장개석)는 옌안에서 출발한 미군 수송기의 목적지와 탑승자에 관심이 많았다. 하루에 몇 번씩 전화통을 들었다. “류보청과 덩샤오핑은 리청에 남고, 천이는 화중(華中) 지역으로 갔다. 린뱌오의 행방은 알 수 없다”는 보고에 짜증을 냈다. “린뱌오를 끝까지 추적해라.” 1개월이 훨씬 지나서야 군통국장 다이리(戴笠·대립)가 지도를 펼쳐놓고 린의 행적을 상세히 보고했다. “산둥(山東)을 전전하다 동북으로 간 것이 확실하다.” 장은 긴 숨 내뱉으며 탄식했다. “동북에 조용할 날이 없겠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장담 못 한다. ‘윈난경비사령관’ 두위밍(杜聿明·두율명)에게 충칭에 오라는 전문을 보내라.”

중·일 전쟁이 끝나자 막강한 군사력을 자랑하던 윈난(雲南)성 주석 룽윈(龍雲·용운)은 중공 못지않은 장제스의 애물단지였다. 장의 지시를 받은 두위밍은 50분간의 전투로 윈난군의 무장을 해제했다. 10월 15일, 충칭에 도착한 두는 장에게 룽윈을 처리한 과정을 설명하며 흥분을 가누지 못했다. 장의 반응은 의외였다. “너는 국가에 공을 세웠다. 노고를 마다치 않고 원망 사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대신, 룽윈에겐 죄를 짓고 국가를 혼란스럽게 했다. 민심이 중요하다. 너를 사령관직에서 해임한다.” 두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국가에 이익이 된다면 개인의 명예나 지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튿날 최고 권력기관 중앙군사원회가 성명을 발표했다. “두위밍은 윈난에서 월권행위를 했다. ‘윈난경비사령관’ 직을 해임하고 후임에 관린정(關隣徵·관린징)을 임명한다.”

린뱌오, 선배 두위밍과의 일전 작심

동북 벽지를 떠도는 ‘동북인민 자치군’. [사진 김명호]

동북 벽지를 떠도는 ‘동북인민 자치군’. [사진 김명호]

10월 18일, 두위밍은 윈난에서 이임식을 마치고 충칭으로 돌아왔다. 당일 오후, 장제스가 두에게 ‘동북보안사령관’ 임명장을 줬다. “소련과 접촉해서 동북의 영토주권부터 접수해라.” 동북에 도착한 두는 10일간 소련군과 연락을 주고받았다. 장에게 전문을 보냈다. “소련군은 철수 준비를 완료했다. 잉커우(營口)항은 이미 ‘동북자치군’이 접수했다. 동북 접수는 무력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미국의 중재로 중공 비적들과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군대를 동북으로 이동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

‘동북민주연군’ 주둔지에서 열린 인민위원 선출 모습. 후보자 뒤에 있는 사발에 콩을 한 개 넣으며 투표권을 행사했다. [사진 김명호]

‘동북민주연군’ 주둔지에서 열린 인민위원 선출 모습. 후보자 뒤에 있는 사발에 콩을 한 개 넣으며 투표권을 행사했다. [사진 김명호]

국·공 충돌이 전국으로 확대되자 미국이 마샬을 특사로 파견했다. 첫 번째 중재에 양측은 동의했다. 1946년 1월 13일 24시를 기해 동북을 제외한 지역의 정전에 합의했다. 중공 중앙은 관내의 정전과 동시에 ‘동북인민 자치군’을 ‘동북민주연군’으로 개칭했다. 사령관에 린뱌오를 임명했다. 린뱌오는 화가 치밀었다. 당 중앙에 의문을 제기했다. “우리 군대가 지역과 도시에 진주할 권한이 있는지 궁금하다. 우리에겐 후방이 없다. 재정권과 후방 지원, 군중동원이 제한된 군대는 비적만도 못하다. ‘동북국’과 ‘동북민주연군’의 전권을 한 사람에게 위임하기 바란다.” 답전이 없자 구들짱(炕)에 앉아 부관에게 마오쩌둥에게 보낼 전문을 구술했다. “미국과 국민당은 한통속이다. 정전을 이용해 관내의 정예를 동북으로 이동하려는 장제스의 음모다. 동북 문제를 해결한 후 남북에서 공격해 우리를 소멸시킬 계획이다. 정전 기간, 동북의 토비(土匪)를 토벌해 창고를 채우고 한간(漢奸)과 악질 지주를 단죄한 후 우리 병력 주둔지에 인민위원을 주민들이 직접 선출토록 하겠다. 주석의 명석한 두뇌가 보다 활발해지길 간구한다.”

산책에서 돌아온 린뱌오가 부관을 불렀다. 구술한 전문의 마지막 구절에 대한 소감을 물었다. 고치는 것이 좋다고 하자 동감했다. 전문을 회수하라고 지시했다. 이미 보낸 후였다. 불경(不敬)을 속죄할 방법은 단 하나, 전쟁 승리 외에는 없었다. 황푸군관학교 생도 시절, 어찌나 무섭던지 보기만 해도 다리가 후들거리던 선배 두위밍과의 일전을 작심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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