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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의 작가’ 또로니, 30㎝ 간격 점 찍자 없던 공간 돋아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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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8호 26면

황인의 예술가의 한끼

대구에서 열린 또로니 개인전. 대구에서 산 아크릴 물감과 파리에서 가져온 붓으로 현장 작업을 했다. [사진 갤러리신라]

대구에서 열린 또로니 개인전. 대구에서 산 아크릴 물감과 파리에서 가져온 붓으로 현장 작업을 했다. [사진 갤러리신라]

니엘 또로니(Niele Toroni, 1937~)는 스위스 출신의 작가로 파리에서 거주하고 있다. 1969년, 파리에서 다니엘 뷔렌(1938~), 올리비에 모세(1944~), 미셀 파르망티에(1938~2000) 등과 함께 자신들의 이름 앞글자를 따서 베엠페테(BMPT)라는 미술 그룹을 결성했다. 회화를 회화로 원점회귀하는 그룹이었는데 이게 68학생혁명이 펼쳐지던 당시의 과격한 시대 상황에서는 오히려 아방가르드 운동으로 이해됐다. 또로니는 1997년 제2회 광주 비엔날레에 하랄트 제만(1933~2005)이 기획한 ‘속도’전의 작가로 참가했다. 첫 한국 방문이었다. 또로니는 붓 한 자루를 들고선 광주 비엔날레 전시장의 자투리 공간 여기저기에 점을 찍고 다녔다.

계명대 특강 땐 학생들 신선한 충격

그가 2006년 5월, 두 번째로 한국을 방문한 건 대구에서 열리는 개인전을 위해서였다. 2005년 한국국제아트페어(키아프)에 프랑스의 장 브롤리 갤러리 소속으로 작품을 출품했다. 또로니의 작품을 본 대구 갤러리신라의 이광호(1955~) 대표가 장 브롤리 갤러리 대표에게 대구 전시를 제안했다. 장 브롤리는 자신의 화랑 소속 작가를 자신의 이익과 관계없이 다른 화랑에 소개하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장 브롤리의 적극적인 성격 덕분으로 전시가 성사됐다.

니엘 또로니는 전 세계의 미술관과 화랑을 다니며 현장에서 작업을 한다. [사진 갤러리신라]

니엘 또로니는 전 세계의 미술관과 화랑을 다니며 현장에서 작업을 한다. [사진 갤러리신라]

니엘 또로니와 그의 부인 달마스 그리고 조수, 이 세 사람이 대구를 방문했다. 니엘 또로니의 짐은 달랑 가방 하나였다. 그 가방 속에는 평붓, 연필, 자, 컴퍼스가 들어 있었다. 자와 컴퍼스를 이용하여 정해진 간격을 측정한 다음 연필로 희미하게 점을 찍고 그 위에 붓질했다. 니엘 또로니는 현장에서 작업을 하는 작가다. 그가 하는 작업의 패턴은 늘 일정하다. 50호 붓으로 가로세로 30㎝ 간격으로 점을 찍어나간다. 대구에 도착한 그는 며칠 동안 갤러리의 어느 공간에 점을 찍을까를 궁리했다. 벽면과 천정이 만나는 모서리. 양쪽 벽 끝에서 바닥으로 내려오는 대각선을 주목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공간을 새롭게 찾아내는 일은 또로니의 장기였다. 점 하나를 찍었을 뿐인데 없던 공간이 새 생명처럼 돋아났다.

대구 시내에서 아크릴 물감을 사다가 갤러리신라 현장에서 점을 찍어나가기 시작했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해야 하는 힘든 작업이었다. 그는 벽에다 흔적을 남기듯 붓을 눌러다 찍었다. 앞으로 한 번 눌러서 찍고 붓을 돌려 뒷면으로 한 번 더 찍었다. 점 하나에 두 번의 붓질이 가해졌다. 수행자처럼 단순한 동작을 반복했다.

또로니의 작업을 부인 달마스가 의자에 앉아 바라보고 있었다. 또로니보다 연상인 그녀는 베트남에서 태어난 프랑스인이었다. 1954년,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이 끝났을 때 파리로 이주했다. 그녀는 대구에 오기 전에 심장 수술을 했다. 숨이 거칠고 걷기가 힘들었다. 몸은 힘들었으나 매일 갤러리를 찾아와 남편의 작업을 지켜보는 게 행복했다. 또로니는 작업 도중 달마스에게 와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두 사람은 금실이 좋았다. 또로니 세대의 유럽 화가들은 재혼, 삼혼이 다반사였다. 또로니는 첫 번째 결혼의 상태를 여전히 지키고 있는 자신을 가리켜 ‘유럽 미술계의 인간문화재’라고 불러 달라며 웃었다.

또로니가 갤러리신라의 전시를 쾌히 수락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또로니는 스위스의 남부 무랄토에서 태어나 자랐다. 무랄토는 이탈리아 문화가 강한 접경지대다. 주민들은 이탈리아어를 많이 사용한다. 또로니는 이탈리아어와 불어, 독일어를 구사했다. 음식도 이탈리아 음식을 좋아한다. 마침 갤러리 건물에 이탈리아 식당이 있었다. 그 점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갤러리신라 마당에서 키우는 로즈마리, 세이지, 바질 등 허브를 따다가 요리사가 즉석에서 샐러드로 만들거나 요리해주는 걸 좋아했다. 갤러리신라의 이탈리아 식당의 메뉴 중에서는 스파게티 알리오 올리오를 즐겼다. 레드 와인은 빠지지 않았다.

또로니는 덩치가 큰 데다 먹성도 좋았다. 특히 소주를 좋아했다. 소주는 광주 비엔날레 때 처음 접했다. 기획자 하랄트 제만이 깡소주를 마셔가며 기획 회의를 진행할 때였다. 광주는 음식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도시다. 한국 음식의 진수를 미식의 도시 광주에서 익혔다. 소주를 실컷 마실 수 있다는 생각에 대구에 온 또로니는 신이 났다. 삼겹살을 상추쌈에 싸서 된장에 찍어 소주와 함께 넘기면 그만이었다.

대구는 뭉티기 등 생고기로 유명한 도시다. 대구에 와서 처음 먹어본 한우 육회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한우 육회로 유명한 경북 영천의 영화식당은 대구 시내에도 지점이 있다. 거기서 먹어본 한우 육회는 프랑스의 땃따(타르타르, tartare)라는 음식과 비슷했다. 유럽에서 생고기를 먹는 나라는 프랑스가 유일하다. 생고기에 익숙한 또로니였다. 그런데 땃따와 한국의 소고기 육회는 양념이 달랐다. 배 간 것에 잣, 계란 노른자, 참기름이 들어간 육회에서 평생 처음 맛보는 고급스러움이 풍겼다. 소주와 함께하니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다. 또로니는 시간만 나면 영화식당을 찾아가서 육회를 즐겼다.

또로니는 그라파도 좋아했다. 와인을 증류한 술이다. 지금은 국내에서도 그라파가 생산되나 당시는 그렇지가 않았다. 이광호 대표는 전국을 뒤져 국내에서 판매되고 있는 그라파를 구할 수 있는 만큼 구했다. 또로니는 에스프레소 커피를 즐겨 마셨는데, 여기다 그라파를 조금 넣어 마시는 걸 아주 좋아했다. 저녁이면 대구 시내의 여기저기에서 또로니가 등장하는 파티가 벌어졌다. 술과 음식에는 절대 지치지 않는 사나이 또로니였다.

윤형근·김창열·박서보 등 만나기도

개인전 오프닝에서 술잔을 마주한 니엘 또로니와 이광호 대표. [사진 갤러리신라]

개인전 오프닝에서 술잔을 마주한 니엘 또로니와 이광호 대표. [사진 갤러리신라]

드디어 갤러리신라의 벽면에 점으로 그려나간 그림이 완성되었다. 파리에서 가져온 종이 작업 몇 점과 일본에서 공수해 온 캔버스 작품 1점 등으로 전시는 형태를 갖추었다. 쾌활한 성격의 또로니는 노래를 좋아했다. 갤러리신라 현장에서 작품이 다 완성되었을 때, 그는 큰 목소리로 ‘오 솔레 미오’를 불렀다. 한번은 갤러리의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는데 어떤 손님이 찾아왔다. 그는 정가를 전공한 청년이었다. 또로니는 정가를 청했다. 정가를 들은 또로니는 그레고리안 찬트를 떠올리며 감명했다. 단순함이 밋밋하게 반복되는 정가와 그레고리안 찬트는 또로니의 점 작업을 많이 닮아 있었던 것.

또로니는 시간을 내어 대구의 계명대에서 특강을 했다. 미술사에 등장하는 세계적인 작가가 직접 하는 강연은 학생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줬다. 동판, 석판 등 구체적인 판 없이도 머릿속에 있는 아이디어로 그림을 똑같이 계속 그려나가면, 그게 에디션을 갖춘 판화가 된다고 하는, 자신의 작업방식에 관한 설명은 형상(판)과 질료(판화)의 개념을 명확하게 설명해주는 명강의였다. 통역은 파리에서 공부한 화가 홍승혜(1959~)가 맡았다. 또로니와 홍승혜는 미술을 대하는 태도가 비슷하여 쉽게 친근해질 수가 있었다. 1969년 스위스 베른에서 하랄트 제만은 ‘태도가 형식이 될 때’라는 전시를 기획했고 이때의 미학을 지속했다. 그 전시에 참여하지 못한 또로니였건만 태도와 형식에 관한 제만의 미학은 공유하고 있었다. 그는 나중에 하랄트 제만과 굳건한 예술적 동지가 되었다. 여기에 홍승혜라는 동지가 한 명 더 늘었다.

또로니는 대구에 보름 정도 체류했다. 이때 마침 서울에서 키아프전이 열렸다. 또로니는 상경하여 윤형근(1928~2007), 김창열(1929~2021), 박서보(1931~) 등 서울의 화가들을 만났다. 윤형근은 이미 장 브롤리에서 전시를 몇 번 가졌다. 그런 인연으로 둘은 각별하게 친했다. 또로니는 윤형근과 백남준을 참 좋아했다.

또로니는 파리로 돌아간 이후에도 한국의 젊은 화가들이 전시하면 찾아가서 격려했다. 그만큼 한국의 인상이 좋았다. 한국에서 손님이 오면 소주를 갖고 왔는지를 먼저 물었다. 파리의 한인 마트에서 소주를 쉽게 구할 수 있게 되면서 그 질문은 슬그머니 사라져버렸다.

황인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전시기획과 공학과 미술을 융합하는 학제 간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 현대화랑에서 일하면서 지금은 거의 작고한 대표적 화가들을 많이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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