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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뇌가 여자 뇌보다 낫다는 건 낡은 미신[BOOK]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편견 없는 뇌
지나 리폰 지음
김미선 옮김
다산사이언스

한 세대도 더 전의 일이다. 수업 중 “유기화학 중 입체화학 부분은 3차원 공간에 대한 복잡한 상상과 사고가 필요해 여학생들은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말을 수시로 하는 화학 교수가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 과목의 A학점은 온통 여학생들이 휩쓸었다. 편견을 깨는 가장 강력한 망치는 ‘진실’이었다.

영국 버밍엄의 에스턴대 산하 에스턴브레인센터에서 인지신경과학을 연구하는 지은이는 이처럼 ‘남자의 뇌와 여자의 뇌는 다르다’는 낡은 미신이 21세기에도 전 세계를 배회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뇌의 성차(性差)는 200년 이상 논쟁‧연구‧조장‧비판‧찬양‧경시돼온 것은 물론 오늘날에도 유전학‧인류학‧역사학‧사회학‧정치학‧통계학 등 거의 모든 연구 영역에서 도도하게 자리 잡고 있다는 설명이다.

지난해 한국 출신 허준이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와 함께 수학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필즈상을 수상한 우크라이나 출신의 여성 수학자 마리나 비아 조프스카. 수학 분야도 더 이상 남성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비아조프스카는 스위스 로잔 연방공대 교수다. [AP=연합뉴스]

지난해 한국 출신 허준이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와 함께 수학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필즈상을 수상한 우크라이나 출신의 여성 수학자 마리나 비아 조프스카. 수학 분야도 더 이상 남성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비아조프스카는 스위스 로잔 연방공대 교수다. [AP=연합뉴스]

지은이는 이를 ‘두더지 잡기’ 게임에 비유한다. 젠더의 차이가 뇌의 차이를 만들고, 뇌의 차이가 인지적 기술과 성격, 기질에서 성차를 만든다는 낡은 오해들이 모습만 바꿔 계속 튀어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뇌영상 등 최신 기술을 활용한 뇌 연구 결과가 계속 나오는데도 말이다.
지은이에 따르면 ‘여성이 사회적‧지적‧정서적으로 열등하다’는 검증되지 않은 주장은 ‘여자와 남자의 뇌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19세기 과학자들의 억측에서 출발한다. 뇌의 차이가 인간의 역량‧특성과 사회적 지위의 차이를 결정한다는 편견이다.
이런 주장은 철학자 존 스튜어트의 “(그렇다면) 키가 크고 뼈가 큰 남자는 몸집이 작은 남자보다 지능이 굉장히 우수해야 하고 코끼리와 고래는 인류보다 엄청나게 뛰어나야 한다”는 반론에 보기 좋게 무너졌다. 그러자 ‘몸 크기 대비 뇌 크기가 지능의 척도’라는 또 다른 두더지가 툭 튀어나왔다. 이 역시 ‘몸집 대비 머리가 큰 치와와는 모든 개 중에서 가장 똑똑한가’라는 반론 앞에 맥을 추지 못했다.
하지만 여성의 뇌가 남성보다 하등하고 이에 따라 사회적 역할을 제한해야 한다는 주장을 입증하려는 시도는 끈질기게 명맥을 이어갔다. 19세기엔 두개학‧수학‧통계학 등이 여기에 동원됐다. 하지만 1906년 ‘통계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영국 학자 칼 피어슨이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머리 크기는 지능의 유효한 지표가 아니다”라고 선언하면서 사이비 과학은 몰락했다.
20세기 들어서는 발달한 영상학으로 뇌의 부위별 기능을 연구해 남녀의 차이를 연구하는 시도가 이뤄졌다. ‘남자와 여자는 다르게 생각한다’ 등의 연구결과는 사실 여성 뇌의 하등함을 증명하려는 시도의 일부였다는 지적이다. 물론 이런 시도는 무산됐다.

지난해 삼성화재배 결승에 올라 여자 프로 바둑기사로는 사상 처음으로 메이저 세계대회 준우승이라는 기록을 쓴 최정 9단. 지난해 말 여자기성전 결승전에서 대국하는 모습. 연합뉴스

지난해 삼성화재배 결승에 올라 여자 프로 바둑기사로는 사상 처음으로 메이저 세계대회 준우승이라는 기록을 쓴 최정 9단. 지난해 말 여자기성전 결승전에서 대국하는 모습. 연합뉴스

그 뒤를 이어 화학 전달자인 호르몬이 뇌의 성차를 결정짓는다는 가설이 등장했다. 흔히 남성의 재정적 성공과 리더십 기술, 공격성과 문란한 성생활은 남성 호르몬으로 불리는 테스토스테론이, 양육 기술이나 바느질 재능은 여성 호르몬으로 인식되는 에스트로겐이 결정된다고 인식돼 왔다. 하지만 이는 테스토스테론과 에스트로겐은 비록 수치에선 차이가 있지만 여성과 남성 모두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을 간과한 주장일 뿐이다.
심리학도 진화론과 연계돼 성차를 증명하려는 시도에 동원됐다. 인간의 능력과 행동적 특성이 선천적이고 생물학적으로 결정되며, 이에 따라 남녀의 생물학적 차이가 사회적 역할 차이로 이어진다는 주장이 나온 배경이다. 하지만 이 역시 증명되지 못했다.
지은이는 20세기 후반에 고도로 발달한 뇌 영상도 ‘스캐너 안의 성 차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남자와 여자는 다른 행성에서 왔을 수도 있을 만큼 서로 다르다는 관념을 강조하는 출판물이 넘쳐흐른 이유다. ‘뇌의 차이가 여자를 더 수다스럽게 한다’ ‘여자는 뇌의 언어 영역이 남자보다 더 크고 더 많은 단어를 사용한다’ 등 솔깃한 주장이 그것이다.
하지만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언어학자인 마크 리버먼은 이를 두고 “이런 단언 중 많은 부분이 다른 연구로 반박됐다”고 지적한다. 리버먼은 “철학자들은 어떤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개의치 않고 단언하는 관행을 ‘헛소리’라는 전문용어로 부른다”고 일갈했다.
남자에 대한 주장도 마찬가지로 억측이 많다. ‘남자의 뇌에는 공감 능력이 거의 없다’고 주장하는 출판물에 대해 『젠더, 만들어진 성』의 저자인 심리학자 코델리아 파인은 “공감을 토대로 한 뇌 성차에 대한 과학적인 증거는 찾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지은이는 남녀나 뇌와 관련해 이렇게 범람하는 근거없는 주장을 ‘뇌 미신’ 신경쓰레기‘ ’신경성차별‘이라고 부른다.

전설적인 체스 그랜드마스터 바비 피셔가 1960년 라이프치히에서 경기하는 모습. 그는 "여자는 절대로 남자보다 체스를 잘 둘 수 없다"고 발언했다. 하지만 이후 여성 체스 그래드마스터가 나왔다. 사진 Ulrich Kohls

전설적인 체스 그랜드마스터 바비 피셔가 1960년 라이프치히에서 경기하는 모습. 그는 "여자는 절대로 남자보다 체스를 잘 둘 수 없다"고 발언했다. 하지만 이후 여성 체스 그래드마스터가 나왔다. 사진 Ulrich Kohls

지은이는 21세기에도 젠더 고정관념에 지속적으로 맞서야 한다고 강조한다. 사회적 젠더 고정관념은 개인의 우울증이나 거식증‧과식증 같은 섭식 장애에 영향을 주는 것은 물론 어린이의 삶, 권력‧정치‧비즈니스‧과학에도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심지어 딥러닝을 기반으로 하는 챗봇도 SNS를 통해 학습하자 16시간 만에 성차별주의자이자 인종차별주의자가 됐다는 일화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인간도 이런 편견‧편향이 없도록 끊임없는 자연과학적‧인문학적‧사회적 환기가 필요하다. 이는 인공지능(AI)의 시대일수록 더욱 필요할 수밖에 없다.

채인택 전 중앙일보 전문기자 tzschaeit@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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