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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한 영국 정치인의 생명 수호 신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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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은경 법무법인 산지 대표변호사

이은경 법무법인 산지 대표변호사

영국 상원의원 데이비드 올턴 경이 얼마 전 방한해 우리 사회에 묵직한 화두를 던졌다. 북한 정치범 수용자의 생명권부터 근래 논쟁적 이슈 중 하나인 안락사와 낙태 문제까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해온 올턴 경의 호소는 열정적이고 강력했다. 1979년 27세 최연소 하원 당선에서부터 여왕이 수여한 귀족 직위인 상원 종신직까지 평생을 정치계에 몸담은 올턴 경은 인간 실존의 토대인 생명권 수호에 누구보다 앞장선 투사다. 자신이 속한 정당이 낙태 지지 입장을 취한다는 이유로 의원직까지 던진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올턴 경의 신념이 항상 주류의 지지를 받아온 건 아니다. 그러나, 성공이 아닌 섬김을 위해 부름 받았다는 신념으로 일관성 있는 삶을 살았다.

데이비드 올턴 영 상원의원 방한
낙태·안락사에 대해 명확한 반대
“죽음 찍어낼 컨베이어벨트 된다”
생명 경시, 죽음 미화 풍조에 일침

올턴 경의 방한은 자유와 인권을 추구하는 공익법인 ‘크레도’, 생명윤리 법률가포럼 ‘루멘비테’가 기획했다. 지난 10일 통일부와 태영호 의원이 공동 주최한 국회 세미나에서 ‘북한 주민 생명권 보호’를, 12일 크레도 좌담회에선 ‘국제 사회의 대처 방안’을, 13일 루멘비테 토론회에선 ‘낙태 문화가 안락사에 미치는 영향’을 발제했다. 이외에도 기관 예방, 언론 인터뷰 등 분초를 다투는 일정을 소화했다. 올턴 경은 빡빡한 일정 중에도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따뜻한 배려로 주변에 잔잔한 감동을 자아냈다. 특히 오랜 기간 투병 중인 김찬진 전 의원을 방문해 지인들에게 기도를 부탁하고, 한결같은 정성으로 남편을 돌본 이영애 전 의원을 위로했다.

22년 전 무작정 찾아온 19세 꽃제비 출신 탈북 소년을 면담한 올턴 경은 북한 인권 상황을 마음 아프게 생각하고 무려 400여 차례나 의회에서 문제를 제기했다. 당시 만난 탈북 소년을 아들처럼 양육해온 일화는 가치에 헌신하는 귀족의 품격을 보여준다. 국제 사회에 중국의 탈북자 강제 송환을 강하게 문제 삼고, 중국이 국제법을 모욕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북한 당국자를 재판에 회부해야 한다는 만장일치 결론을 내려서 유명해진 2014년 유엔 조사위원회(COI) 보고서를 인용해 “북한이 대량의 사망자를 야기하는 조건을 만들어 특정 계층의 사람을 박해하고, 특히 기독교 신자들을 의도적으로 제거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북한 주민 수십만명이 자신의 행위가 아닌 성분 때문에 잔혹한 죽음을 맞이했고, 살인·고문 및 기아 방치 등 반인도적 범죄는 나치 학살과 유사하다고 열변을 토했다. 북한의 대량학살 혐의를 조사하기 위한 국제 연대를 당장에라도 시작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중국과 러시아가 북한의 반인도적 범죄를 국제형사재판소(ICC)에 회부하는 결의안을 또다시 거부한다면 독립재판소 설치를 검토해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올턴 경은 신성한 생명에 대한 존중을 희미하게 만드는 낙태 문화로 인해 이전엔 상상할 수 없던 일들이 벌어지고, 돌봄과 죽임을 같은 뜻으로 병용하는 현실까지 맞았다고 한숨지었다. 낙태 및 안락사에 대한 반대자를 ‘남의 고통을 도외시하는 사람’이라고 희화화하는 건 사회적·윤리적 가치를 가볍게 무시하는 태도라고 항변했다. 이런 태도에는 낙태·안락사를 통해 보건 비용을 줄이려는 정책 입안자들의 속내가 숨어 있다고 일침을 놓았다. 중증 또는 말기 환자는 본인과 가족의 인생만 낭비하는 게 아니라 건강보험 자원까지 쓸모없게 만든다는 주장이 공공연하게 펼쳐지는 현실을 꼬집은 것이다.

특히 조력 자살이 사회적 선택지라는 메시지는 일부 환자들이 이러한 선택지를 반드시 취해야 할 것만 같은 압력을 느끼게 만들고, 자살을 원치 않는 환자들은 계속 살고 싶은 이유를 끊임없이 늘어놓아야만 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낙태·안락사 찬성론자들이 늘 부르짖는 인간의 자기 결정권에 대해서는 ‘절망이 준 어쩔 수 없는 선택은 진정한 자기 결정이 아니고, 어떤 권리를 갖는다는 게 항상 바른 선택을 한다는 뜻도 아니다’라고 분명한 선을 그었다.

오늘날 만병의 근원은 ‘나’에 대한 지나친 몰두이며, ‘자율’과 ‘독립’이 만능이라는 주문 같은 믿음은 반드시 의심해야 한다는 올턴 경의 한마디는 울림이 컸다. 인간이 연민을 가진 타인의 보살핌을 받는 건 문명사회의 특징이고, 타인에게 의존하는 건 인생 어떤 단계에선 자연스러운 일이지 결코 수치스러운 게 아니라고 힘주어 강조했다.

낙태 합법화에 이은 조력 자살 법제화는 산업적 스케일로 생명의 종지부를 찍어낼 컨베이어벨트 사회로 탈바꿈하는 거라고 경고하고, 죽음을 앞당기는 악법 옹호에 에너지를 낭비하는 대신 완화치료 및 호스피스 지원을 통한 조력 생존에 가치를 두어야 한다고 당부했다. 신념이 부른 강경한 메시지는 매번 정곡을 찔렀다. 눈치라곤 조금도 보지 않는 용감한 사람이다.

정치는 가치 판단을 통해 국가 정책을 결정하고, 국가 정책은 국민의 삶에 가장 강력한 지배력을 행사한다. 신념으로 정책을 선택하고, 선택한 결과에 책임져온 영국 정치인 데이비드 올턴 경. 왠지 씁쓸한 한국 정치의 현주소를 돌아보게 했다.

이은경 법무법인 산지 대표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