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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정하의 시시각각

이런 고마운 야당 어딨나…윤석열 정권 기막힌 야당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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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정하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김정하 정치디렉터

김정하 정치디렉터

적이 파놓은 함정이 뻔히 보여도 애써 모른 체하며 함정을 향해 돌진한다. 상대가 펀치는 강해도 지구력이 약점인데 오히려 속전속결 난타전을 시도한다. 최근 이재명 대표 방탄에 올인하는 더불어민주당의 풍경이다.

여권, 이재명 구속 진짜로 바랄까 #여의도에 남는 게 총선 유리 판단 #여권 속셈 알아도 따라가는 야당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2월23일 오전 국회에서 자신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와 관련해 기자회견을 열고 윤석열 대통령과 검찰을 고강도로 비난했다. [연합뉴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2월23일 오전 국회에서 자신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와 관련해 기자회견을 열고 윤석열 대통령과 검찰을 고강도로 비난했다. [연합뉴스]

오는 27일 국회에서 이 대표 체포동의안 표결이 벌어진다. 민주당에서 28표 이상의 이탈표가 나오면 체포동의안은 통과된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분위기를 보면 민주당은 똘똘 뭉쳐 체포동의안을 부결시킬 가능성이 훨씬 크다. 이 대표를 대신할 리더십이 아직 마땅찮은 데다 무엇보다 당내에서 ‘윤석열 검찰정권’에 대한 증오와 공포심이 강렬하기 때문이다. 당 대표까지 구속된다면 일반 의원들이야 완전히 무방비로 검찰에 당할 것이란 걱정도 이해하지 못할 건 아니다. 이런 집단심리에서 민주당은 이미 노웅래 의원 체포동의안도 압도적으로 부결시켰다.

 그런데 정말 여권이 진정으로 이 대표 체포동의안이 통과되기를 바랄까? 천만의 말씀이다. 현재 이 대표의 존재는 윤석열 정권의 핵심 국정 동력이나 마찬가지다. 윤 대통령을 지지하는 이유는 이 대표가 싫어서이고, 이 대표를 지지하는 이유는 윤 대통령이 싫어서다. 두 사람은 적대적 공생관계의 이상적 모델이다. 이 대표가 광화문에서 윤 대통령 규탄집회를 열면 윤 대통령은 가만히 앉아서 지지층 결집 효과를 누리는 셈이다. 이 대표가 계속 미디어에 등장해 대통령을 공격하는 상황이 여권 입장에선 전혀 나쁠 게 없다. 오히려 이 대표가 구속돼 여의도 정치에서 퇴장하면 윤석열 정권의 진정한 위기가 시작될지 모른다. 그래서 오죽하면 국민의힘에서 농반진반으로 “혹시 민주당에서 체포 찬성표가 많이 나올 것에 대비해 우리라도 반대표를 보태줘야 되는 거 아니냐”는 말까지 나올까.

2월4일 오후 서울 세종대로에서 더불어민주당이 윤석열정권 민생파탄-검사독재 규탄 국민보고대회를 개최했다. [뉴스1]

2월4일 오후 서울 세종대로에서 더불어민주당이 윤석열정권 민생파탄-검사독재 규탄 국민보고대회를 개최했다. [뉴스1]

여권의 노림수는 뻔하다. 내년 4월 총선 때까지 이 대표의 사법 리스크를 극대화하면서 재판 국면을 질질 끌고 가 선거를 유리하게 이끌겠다는 것이다. 체포동의안이 부결되면 검찰은 3월 중으로 이 대표를 불구속 기소할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되면 앞으로 이 대표는 매주 한 번 정도는 재판에 나와야 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당장 지난해 9월에 기소된 선거법 재판의 공판기일이 3월 중에 세 번이나 잡혔다. 여기에다 서울중앙지검의 대장동·백현동·성남FC 수사, 수원지검의 쌍방울 대북송금 수사, 성남지청의 정자동 호텔 특혜 수사 등이 줄줄이 재판으로 넘어가면 이 대표는 법원에 나가느라 정상적인 당무가 가능할지 모르겠다.

게다가 현직 당 대표가 형사재판을 받으니 당에 대한 보도는 재판 얘기에 초점이 맞춰질 수밖에 없다. 신문사 경험에 비춰보면 특정 정치인에 대한 보도가 정치부가 아니라 사회부 위주로 돌아가는 상황이 생겼을 때 그 정치인이 잘되는 걸 거의 본 적이 없다. 민주당이 아무리 좋은 정책을 내놓고 유능한 인재를 영입해 봐야 재판 이슈에 가리기 십상이다. 민주당은 서서히 말라간다. 이미 당 지지율은 국민의힘에 역전을 허용했다. 야당은 유력한 차기 주자가 있어야 지지율이 뜨는 법인데, 그 주자가 재판 결과에 따라 대선 출마 자체가 불가능해질 수 있다면 지지층이 동요하는 게 당연하다.

한국갤럽 정기여론조사에서 지난해 가을부터 엎치락뒤치락 하던 여야의 지지율이 최근들어 갑자기 확 벌어지기 시작했다. 자료=한국갤럽

한국갤럽 정기여론조사에서 지난해 가을부터 엎치락뒤치락 하던 여야의 지지율이 최근들어 갑자기 확 벌어지기 시작했다. 자료=한국갤럽

애초부터 사법의 영역은 윤석열 정권이 필살기를 발휘할 수 있는 최적의 전장이다. 민주당은 집권 당시조차 사법 분야에선 여러 약점을 드러냈고, 정권 교체의 씨앗이 뿌려진 곳도 그쪽이다. 지금 민주당이 이 대표 재판에 명운을 걸겠다는 것은 불리한 어웨이 경기를 자처한 꼴이다. 민주당이 진작에 이 대표 사법 리스크를 털고 민생경제 분야로 전장을 옮겼다면 윤석열 정권은 꽤나 난감했을 것이다. 작금의 경제 난국은 대통령의 의욕만으로 돌파할 수 있는 단계를 넘어선 상태다. 민주당도 이를 잘 안다. 그런데도 굳이 여권 각본대로 움직여 주겠다니 세상에 이런 고마운 야당이 또 어딨나. 윤석열 정권의 기막힌 야당복(福)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