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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강인욱의 문화재전쟁

대만 고궁박물원 보물 60만점의 주인은 누구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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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중국·대만의 자존심 갈등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문화재와 사람은 운명이 비슷하다. 전란이 일어나면 문화재도 사람과 함께 피난을 간다. 한국전쟁에서도 그랬다. 서울에 있던 국보급 유물이 부산으로 긴급 대피했다. 심지어 신라 금관은 미국으로 몰래 옮겨갔던 적도 있다.

중국도 마찬가지다. 최근 양안 갈등이 극대화하면서 중국의 무력 침공마저 우려되는 상황이다. 이런 정치적 갈등은 문화재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초점은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이 맞싸웠던 국공내전 당시 대만으로 옮겨온 유물 60만여 점이다. 어쩌다 대만에 중국의 국보가 건너가게 됐을까.

수천년 중국사 압축한 귀한 유물
1948년 장제스가 중국서 옮겨와

1965년 세계적 박물관으로 개관
6년 뒤 베이징에 이름 같은 박물관

양안 긴장 높아지며 문화계 술렁
중국서 “되찾아와야” 목소리 커져

험난한 중국사, 기구한 문화재

대만 국립고궁박물관은 중국 문화의 정수를 보여준다. 이곳의 문화재를 대표하는 팔다리가 잘려 나간 반가사유 보살상. 대만과 중국의 현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사진 강인욱, 위키피디아]

대만 국립고궁박물관은 중국 문화의 정수를 보여준다. 이곳의 문화재를 대표하는 팔다리가 잘려 나간 반가사유 보살상. 대만과 중국의 현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사진 강인욱, 위키피디아]

대만과 중국에는 각각 같은 이름의 ‘고궁박물원’이 있다. 그 시작은 청나라 궁중 보물이었다. 1912년 청나라가 멸망하면서 마지막 황제 푸이의 것이 되었지만, 당시 많은 유물이 관리 소홀로 사라지거나 불타기도 했다.

중국 군벌은 1925년 푸이를 베이징 자금성에서 쫓아내고 그간 관리해온 유물을 자금성에 모아 ‘고궁박물원’이라는 이름으로 전시했다. 청나라 황실 보물을 국유화하여 중국 대중에 공개한다는 것은 300년 넘게 중국을 통치한 만주족의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한족의 국가가 다시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리는 상징이기도 했다.

금과 옥으로 만든 청나라 때 상자. [사진 강인욱, 위키피디아]

금과 옥으로 만든 청나라 때 상자. [사진 강인욱, 위키피디아]

하지만 곧바로 일본이 만주를 침략하고, 나아가 중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면서 이 유물들은 중국 각지와 해외로 유랑의 길을 떠나야 했다. 그 와중에 중국을 대표하는 고인류 화석인 베이징원인 인골을 미국으로 이송하려다 톈진 항구에서 사라지는 사건도 있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한 뒤에도 문화재의 수난은 끝나지 않았다. 베이징으로 다시 유물을 보낼 겨를도 없이 곧바로 다시 국공내전에 휩싸이게 됐다. 전황이 불리해진 국민당은 1948년 중앙은행 금괴와 함께 난징에 보관 중인 고궁박물원 유물을 대만으로 실어 날랐다. 국민당 지도자 장제스(蔣介石)는 1920년대부터 고궁박물원 운영에 관여할 정도로 문화재에 남다른 관심이 있었다.

배추 모양 조각품인 기인 ‘취옥백채(翠玉白菜)’. [사진 강인욱, 위키피디아]

배추 모양 조각품인 기인 ‘취옥백채(翠玉白菜)’. [사진 강인욱, 위키피디아]

장제스가 3차에 걸쳐서 운송한 유물은 방대했다. 총 4만6000점에 그림이 5500점, 그리고 서책이 54만점에 달했다. 전체 고궁박물원의 4분의 1 정도 분량이었다. 국민당이 전쟁 상황인지라 유물을 급하게 가져갔다. 그러다 보니 무거운 것은 남겨두고 비교적 가볍고 포장하기 쉬운 서화와 서적류가 많았다. 예컨대 가볍고 아름다운 옥기(玉器)나 황금 유물이 많았다. 지금도 타이베이 고궁박물원을 대표하는 문화재로 돼지고기나 배추 모양의 옥기가 주로 꼽힌다.

자금성에 세운 다른 고궁박물

17개의 공을 새긴 상아 장신구. [사진 강인욱, 위키피디아]

17개의 공을 새긴 상아 장신구. [사진 강인욱, 위키피디아]

문화재의 수난은 계속됐다. 대만으로 황급하게 옮긴 탓에 보존이 여의치 않았다. 항온·항습설비가 빈약한 여러 창고를 전전하다가 박물원이 세워진 1965년에서야 제 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타이베이에 전통 중국 건축 양식의 고궁박물원이 들어서면서다.

수많은 보물을 대만에 앗긴 중국은 1971년 똑같은 이름의 ‘고궁박물원’을 베이징 자금성에 개관했다. 개관 당시에는 좋은 유물이 그리 많지 않았다. 상당수 문화재가 대만에 건너간 이유도 있었지만, 1966년 시작된 문화혁명으로 중국의 귀중한 유산이 말 그대로 궤멸적인 피해를 보았기 때문이다.

청동기 시대 유물. [사진 강인욱, 위키피디아]

청동기 시대 유물. [사진 강인욱, 위키피디아]

타이베이 고궁박물원은 개관 직후부터 국제 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세계적 수준의 유물 덕분에 세계 최고 박물관의 하나로 인정받았다. 프랑스 루브르, 영국 브리티시 박물관, 러시아 에르미타지, 미국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등 서구를 대표하는 박물관이 오랜 기간 식민지를 경영하며 획득한 다른 나라의 명품을 많이 소장한 것과 달리 타이베이 고궁박물원은 중국의 수천 년을 보여주는 자신들의 보물로만 이뤄졌기에 정체성·차별성 또한 또렷했다.

타이베이 고궁박물원은 외성인(外省人·국민당과 함께 대만으로 건너온 중국인)의 큰 자랑이었다. 1980년대 후반 중국의 개방정책이 실시되기 전까지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서 중국의 역사와 고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거의 유일한 통로였다.

침략·이민 끊이지 않은 대만

세계적 박물관으로 꼽히는 대만 고궁박물관 전경. [사진 위키피디아]

세계적 박물관으로 꼽히는 대만 고궁박물관 전경. [사진 위키피디아]

대만 고궁박물원은 전형적인 중국식 건축 양식이다. 사람들도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대만이 원래부터 중국의 역사였다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만이 본격적으로 중국의 역사로 편입된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중국인은 대체로 명나라 때부터 대만 해안을 중심으로 살기 시작했다.

대만의 역사는 마치 여러 겹으로 덮인 파이와 같다. 무엇보다 민족 구성이 다양하다. 큰 흐름만 보아도 8개 이상의 민족이 시기를 달리하며 이 작은 섬을 지배해 왔다. 폴리네시아 계통의 원주민, 푸젠과 광둥 지역에서 주로 건너간 민남인과 객가인, 17세기 네덜란드의 진출, 해적 출신 정성공의 통치, 청나라의 수탈, 일본의 식민지를 거쳐서 국공내전 이후 밀려온 국민당의 외성인까지 수많은 침략과 이민이 끊이지 않았다.

대만인은 한국인 달리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긍정적으로 본다. 그 이전에 대만을 지배했던 명나라나 청나라가 대만을 국가의 일부로 보지 않고 대만인을 식민지 사람들처럼 탄압했기 때문이다. 일본이 그나마 비교적 신사적으로 대해줬다는 역설이 대만의 고단했던 과거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다민족 기반의 대만은 한때 대외적으로 중국을 대표하는 ‘자유중국’으로 불렸다. 곧 대륙으로 돌아가야 할 외성인들이 잠시 머무르는 ‘임시 중국’과 같았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수많은 사람의 피해가 있었다. 최근까지 금기시됐던 2·28 사건이 대표적이다. 1947년 국민당 군대가 원래 대만에 살던 사람들의 시위를 무력 탄압하며 약 2만 명(추산)이 사망한 참극이다.

중국 대륙 회복 의지의 상징물

장제스

장제스

대만 고궁박물원의 성격도 복합적이다. 다양한 주민이 모여있는 대만에서 ‘한족을 대표하는 중국 민족주의’를 구현하는 대표적인 공간이기 때문이다. 대륙 회복의 상징으로 중국 본토의 유물로 채워진 고궁박물원이 ‘대만의 얼굴’로 알려진 반면에, 타이완의 복잡다단한 역사를 보여주는 종합적인 역사박물관은 아직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제가 대만을 지배하던 시절에 세운 ‘국립대만박물관’이 있지만 수집품이 1만점이 조금 넘고, 그나마 일제 식민지 시절에 모은 자연 동물과 광물 등이 대부분이다. 일본이 식민지 근대화를 홍보하기 위해 세운 것이기 때문이다.

대만은 한동안 중국을 대표하는 국가로 여겨졌지만, 지금은 세력 판도가 완전히 뒤바뀌었다. 중국과의 국력 차이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1960년대에 대만은 특공대를 조직해 중국 해안가를 공격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중국의 침략에 대비해야 하는 상황이다.

주민도 많이 달라졌다. 장제스가 대륙에서 쫓겨올 때 함께 온 국민당 군인 200만 명과 외성인 1세대도 이제 살아남은 이가 거의 없다. 지난 수십 년간 대만을 이끌어온 이데올로기인 ‘대륙 회복’을 따르는 사람도 많지 않다. 최근 장제스의 혼외 증손자가 타이베이 시장이 되기도 했지만 중국과는 분리된 별개의 대만으로 살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문화재 반환을 요구하는 중국

반면 중국은 대만 합병의 욕망을 갈수록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장제스에 빼앗긴 유물을 되찾아 와야 한다는 여론도 일고 있다. 역설적으로 타이베이 고궁박물원에 있는 귀중한 유물이야말로 대만을 중국의 일부로 삼아야 한다는 당위성의 근거로 이용되고 있다. 국민당 군인과 이주민 1세대가 세상을 떠났어도 대만이 중국의 일부임을 증명하는 중국식 건축과 대륙에서 건너온 수십만 점 고궁박물원 문화재가 대만의 딜레마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중국과 타이완의 문화재 전쟁은 이제 시작이다. 앞으로 양안 갈등이 촉발될 때마다 문화재의 안위 또한 계속 위협받을 것이다. 지진이 잦고 습기가 많은 타이완의 자연환경도 무시할 수 없다. 중국 국공내전 중 문화재를 옮기면서 입은 피해의 상당수는 폭격이 아니라 흰개미와 습기 같은 열악한 조건이었다. 사람과 이념 갈등이 문화재에 전가될 경우 더는 회복될 수 없는 피해가 대대로 이어질 수 있다. 남북 분단의 긴장이 고조되는 우리에게도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