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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이대로 두시죠" 의사 돌직구…웰다잉 택한 이어령 한마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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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최철주 전 중앙일보 편집국장

최철주의 독거노남

지난해 2월 26일 별세한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 그는 항암치료 대신 웰다잉을 택했다. [중앙포토]

지난해 2월 26일 별세한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 그는 항암치료 대신 웰다잉을 택했다. [중앙포토]

2017년 6월의 세 번째 월요일 저녁. 서울 정동 세실레스토랑에 들어섰을 때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하 존칭 생략)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벌써 도착한 J박사와 이야기 중이었는데 분위기가 어두웠다. 이어령은 한 달 전 서울 평창동 그의 사무실에서 마주 앉은 내게 이런 부탁을 했다.

“속 시원하게 설명해 줄 만한 좋은 의사 없을까요. 내가 암 투병 중이오.”

신문사 퇴직 후 이곳저곳에서 웰다잉 강의를 하러 다니던 중 나는 그가 앓고 있다는 소문을 전해들은 적이 있다. 이어령은 딸 이민아 목사가 몹시 아팠을 때인 2011년 7월에도 저녁식사에 나를 초대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어령은 암 치료를 둘러싼 궁금증을 풀어 줄 의사의 조언을 간절히 희망했다.

2017년 내가 이어령에게 처음 추천했던 J는 웰다잉 취재 과정에서 알게 된 독특한 의료인이었다. 미국에서 25년 동안 암 연구와 치료에 전념해 왔고, 국내에서도 활발하게 일하며 지켜온 명의라는 이름값 때문에 J의 항암 치료를 받으려면 2년 이상 기다려야 했다.

그는 의사이면서 토속적이고도 철학적인 화두를 자주 던지는 말재주꾼이라 이어령의 시선에 딱 꽂히기 좋은 인물이었다. 이를테면 말기 환자 가족이 그에게 “최선을 다해 주세요. 모든 것을 다 맡기겠습니다”라고 하소연하면 “아니요. 그렇게 맡기면 나중에 찾아갈 게 없어요. 나도 별로 할 게 없고요”라고 답변했다. 어차피 말기 단계에서는 환자 스스로가 웰다잉을 생각해야 한다는 뜻을 넌지시 던지곤 했다.

J는 말기 암 치료의 최종 단계에 자연스럽게 죽음을 맞이하는 존엄사를 강조해 온 흔치 않은 의사였다. 나는 이어령에게 그의 평소 생각을 미리 설명해 두었다. 식사가 시작되면서 이어령은 자신의 여러 가지 증상과 검사 중 겪는 고통, 갖가지 상념을 소상하게 나열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내가 할 일이 참 많아요. 지금 20여 가지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데… 책도 여러 권 써야 하고 방송 프로그램도 있고….”

유창하던 그의 말이 여기서 그쳤다. 한참 후에 그는 “이게 그동안 내가 병원에서 받았던 검사 자료와 의무기록 사본”이라고 말하며 가지고 온 봉투 속에서 서류를 꺼내 J 앞으로 내밀었다. 무거운 침묵의 시간이 흐르면서 저녁식사가 거북하게 느껴졌다. J는 서류를 넘길 때마다 이어령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고는 한참 후 아무런 수식어도 붙이지 않은 채 거두절미하고 이렇게 말했다.

“장관님, 암을 이대로 놔두시면 어떻습니까. 그냥 이대로 사시면서요. 나는 암환자가 아니라고 생각하시고 일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하시는 게 낫겠습니다. 3년 사시게 되면 3년치 일하시고, 5년 사시게 되면 5년치 일만 하시는 게 좋겠어요. 그게 치료 방법입니다.”

나는 J가 그토록 단도직입적으로 말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J의 권고안은 오래전 그의 딸이 선택했던 것과 같은 것이었다. 이어령은 “허, 참” 하고 가볍게 웃어넘겼다. 세상에 가장 긴 이야기를 재미있게 만들어내는 언어마술사 이어령에게 J는 가장 짧고 쉬운 문장으로 설명했다. 나는 참으로 잘 조화된 질문과 답변이라 생각했다. 이어령의 긴 질문은 서류 속에 있었고, J의 답변은 인생을 다 산 할아버지의 농축된 식견처럼 표출됐다. 이어령은 한식 요리를 먹으면서 마지막에는 하얀 밥에 나물 조금, 그 위에 고추장 한 숟가락 듬뿍 넣고 참기름까지 주룩 흘려넣어 비빔밥을 만들었다. 침묵의 식사시간을 메우려는 듯한 이어령의 재빠른 즉석요리 솜씨를 J는 재미있다는 듯 쳐다봤다.

이어령은 그때 어떤 암환자 이야기를 꺼냈다. 가장이 중병에 시달리면 가족들의 속내도 복잡하게 얽힌다는 것이었다. 환자를 둘러싼 세상의 단면을 우스갯소리로 풀어내자 우리 셋이 모두 큰소리로 웃었다. 한참 후 J가 자신의 소견을 마무리하는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저는 환자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자주 합니다. 살기 위해 치료받을 것인가, 치료받기 위해 살 것인가를 생각해 보자고요. 환자마다 받아들이는 게 다 다릅니다.”

이어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래요”가 유일한 코멘트였다. 언제나 긴 문장이었던 그의 말솜씨에 변화가 생긴 것을 나는 주목했다. 그의 눈 가장자리가 젖어 있었다. 헤어질 때 그가 내민 손에 힘이 실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