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촉발된 서방의 금융제재로 러시아의 수출 대금 결제에서 달러ㆍ유로화 비중이 급격히 줄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신 러시아 자국 화폐인 루블과 중국 위안화의 비중은 그만큼 올라갔다.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로 서방과 러ㆍ중 사이 ‘통화 블록화’가 당초 예측보다 더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는 분석이 뒤따른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1년 넘게 계속되면서 서방의 대러시아 금융제재도 강화되고 있다. 이에 따라 러시아의 달러 및 유로화에 대한 결제 비중도 크게 줄고 있다. 반면 자국 화폐인 루블과 중국 위안화 결제 비중은 계속 커지고 있다. 연합뉴스
23일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은 러시아중앙은행 자료를 토대로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러시아의 수출 대금 결제 통화 중 달러ㆍ유로의 비중이 30%포인트 이상 줄었다고 전했다. 우크라이나 전쟁 직전인 지난해 1월만 해도 달러(52%)와 유로(35%)의 비중은 87%에 달했지만, 지난해 9월 그 비중이 53%(달러 34%, 유로 19%)까지 내려갔다는 것이다.
그만큼 루블ㆍ위안의 결제 비중은 커진 상태다. 이미 지난해 9월 그 비중이 47%로 달러ㆍ유로 결제를 곧 넘어설 태세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서방의 국제금융결제망(SWIFTㆍ스위프트) 퇴출 이후에도 제재 대상이 아닌 러시아 국내외 은행들은 원유 거래 등에서 달러ㆍ유로 대금 결제를 계속하고 있지만, 러시아산 석유ㆍ천연가스의 대서방 수출이 줄어들면서 그 비중도 하락세다. 특히 러시아의 가장 큰 고객이었던 유럽으로 가는 천연가스가 급감한 탓이 크다는 분석이 나온다.
가스협력이 '루블·위안' 키워
반면 중국과 거래에선 루블ㆍ위안 결제가 일반화되고 있는데, 중국행 천연가스 규모가 점차 커지면서 결제 비중도 자연스럽게 올라가는 모습이다.
러시아는 2019년 개통한 ‘시베리아의 힘-1(POS-1)’ 가스관을 통해 중국에 연간 38bcm(1bcm=10억㎥)의 천연가스를 공급하고 있는데, 양국은 사할린에서 중국 북부 지역으로 들어가는 극동가스관(연간 10bcm 공급)도 신규로 건설하기로 합의한 상태다.
이뿐 아니라 몽골을 경유하는 ‘시베리아의 힘-2(POS-2)’ 가스관(연간 최대 50bcm 공급) 건설도 곧 타결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올봄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러시아를 방문하면 공급 시기와 가격 등 가시적인 결과를 낼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러시아는 지난 2019년 개통한 '시베리아의 힘-1(POS-1)' 가스관 등을 비롯해 중국으로 보내는 새로운 천연가스 인프라 건설에 적극 나서고 있다. 사진은 러시아 국영 가스기업인 가스프롬의 직원이 POS-1 가스관을 점검하는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쟁 이전인 지난 2018년 유럽에 수출한 천연가스(파이프라인가스ㆍPNG)는 200bcm, 지난해는 100bcm으로 반토막이 난 상태다. 즉 유럽에서 줄어든 수출량만큼을 중국으로 보내겠다는 계획인 셈이다.
또 중국은 러시아 민영 에너지기업인 노바텍이 추진하는 북극 액화천연가스(LNG) 프로젝트에도 지분 투자를 하는 등 전방위로 러시아산 가스를 빨아들이고 있다. 세계 최대 가스 수출국인 러시아와 세계 최대 가스 수입국인 중국이 협력하면서 루블ㆍ위안의 위상도 덩달아 올라가는 형국이다.
제3국의 CIPS 거래도 늘어
서방의 스위프트에 대항한 중국의 위안화 국제결제망(CIPS)이 러ㆍ중의 통화 블록 강화에 일조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러시아산 석유ㆍ천연가스를 사들이는 제3국들이 ‘세컨더리 보이콧’ 등 서방의 제재 강화에 대비해 CIPS 거래를 점차 늘리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중국인민은행 등에 따르면 CIPS의 지난달 거래 건수는 하루 평균 2만1000건으로 우크라이나 전쟁 전보다 1.5배 늘었다.
서방의 대러시아 제재가 러시아 금융기관과 기업에만 악영향을 미치는 게 아니라는 지적도 나온다. 러시아로 달러ㆍ유로화 송금이 어려워지면서 대러시아 사업을 하는 서방 기업들이 고초를 겪고 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제3국의 위안화 국제결제망(CIPS) 거래도 늘리고 있다. 이에 따라 중국과 러시아의 통화 블록화가 탄력을 받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연합뉴스
일례로 일본 미즈호은행은 지난해 10월 고객사에 “달러 이외의 통화를 이용하든지, 다른 은행을 통해 송금하라”는 내용의 통지문을 보냈다. 그만큼 해외에서의 자금 조달이 어려워졌다는 얘기다.
기업 입장에선 ‘대러시아 제재에 동참해 러시아 사업에서 손을 떼면 되지 않느냐’는 압박도 걱정이다. 러시아에서 사업 중인 한 한국 업체 대표는 “러시아 시장에서 철수하면 단순 손실이 아니라 수십 년 간 쌓은 기반이 무너지는 것”이라며 “전쟁이 끝나고 다시 러시아로 돌아와도 이를 재건할 여력이 없고, 정부든 어느 누구도 도와주지 않을 것”이라고 토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