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50년째 스키 초급코스, 그래도 행복"…홋카이도 '눈'은 달랐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일본 홋카이도 토마무 설산에서 스노보드를 즐기는 모습. 일년 중 100일 가까이 눈이 쏟아지는 홋카이도는 모든 스키어의 로망의 장소다. 백종현 기자

일본 홋카이도 토마무 설산에서 스노보드를 즐기는 모습. 일년 중 100일 가까이 눈이 쏟아지는 홋카이도는 모든 스키어의 로망의 장소다. 백종현 기자

영하 10도 아래로 떨어지는 강추위와 하루 강설량 2~4m의 폭설이 섬을 덮치고 산을 잠재웠다. 재난 영화 한 장면이 아니라, 지난 일주일 일본 홋카이도(北海道)에서 경험한 일상적인 겨울 풍경이다.

일본 최북단 섬으로 12월부터 3월까지 대략 4개월 가까이 눈 속에 뒤덮이는 겨울 왕국. 억지로 만든 눈이 아닌 천연 설에서 길게는 5월 초까지도 스키를 즐길 수 있는 곳이 홋카이도다. 스키어의 성지로 통하는 이곳에서 생애 첫 스노보드에 도전했다. 한낮에는 솜털 같은 ‘파우더 스노’ 위에서 스노보드를 즐기고, 밤에는 산 아래 리조트로 내려와 맘 놓고 휴식을 즐겼다. 홋카이도의 겨울은 너무나 혹독하고도 눈이 부셔, 되레 현실감이 없었다. 홋카이도에서 일생의 버킷 리스트를 하나 지웠다.

솜털 위의 질주

침엽수로 촘촘한 토마무의 슬로프를 미끄러져 나가는 스노보더의 모습. 험준해 보이지만 초급자용 슬로프다.

침엽수로 촘촘한 토마무의 슬로프를 미끄러져 나가는 스노보더의 모습. 험준해 보이지만 초급자용 슬로프다.

국경의 긴 운해를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설국』의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이 땅의 겨울을 보았다면, 아마도 이런 문장을 남기지 않았을까. 인천을 떠난 지 2시간 50분, 비행기가 고도를 낮추며 구름 아래로 내려오자 그야말로 설국이었다. 항구와 도로, 숲과 들판, 집집이 두툼한 생크림 같은 눈을 얹고 있었다. 차창 밖 모든 것이 하얗고 투명했다.

홋카이도가 전 세계 스키어의 로망이 된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 설질. ‘파우더 스노’를 만날 수 있어서다. 수분이 거의 없는 파우더 스노는 손에 쥐면 뭉쳐지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흩어져 날아가 버린다. 소위 인공눈으로 다진 ‘얼음판’에서 스키를 타는 것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홋카이도에만 116개의 스키 리조트가 있을 만큼 인프라도 탄탄하다. 이들이 품은 슬로프를 하나로 이으면 장장 487㎞에 이른다고 한다. 적설량도 많다. 홋카이도에는 한 해 평균 100일 가까이 눈이 내리고, 10m 이상의 눈이 쌓인다(국내 최대 적설량은 1962년 1월 울릉도가 기록한 2.93m).

곤돌라에서 내려다본 토마무 스키장. 솜털처럼 가벼운 '파우더 스노'를 즐길 수 있는 장소다.

곤돌라에서 내려다본 토마무 스키장. 솜털처럼 가벼운 '파우더 스노'를 즐길 수 있는 장소다.

공항에서 차로 2시간을 달려 홋카이도 스키 성지 중 하나인 토마무(1239m) 산에 닿았다. 29개의 슬로프(약 22㎞)를 갖춘 이 거대한 산에서 난생처음 스노보드에 도전했다. 2시간짜리 짧은 기초반 강습만 마치고, 냅다 곤돌라에 올랐다. 일어서기, 넘어지기, 일명 ‘낙엽’으로 통하는 ‘토 사이드 슬리핑(Toe Side Slipping)’ 밖에 할 줄 몰랐지만, 지난 일주일간 유튜브로 10시간 이상 학습한 터라, 자신감은 하늘을 찔렀다.

29개 슬로프가 서로 거미줄처럼 얽혀 있어, 일단 코스부터 짰다. 1171m 높이 곤돌라 정류장에서 리조트 센터(540m)로 이어지는 초급자 코스를 따라 연결하니 자그마치 4.85㎞짜리 코스가 완성됐다.

일단 출발. 포근한 구름처럼 보이던 슬로프는 정상에서 보니 전혀 위압감이 달랐다. 동네에서 쌓은 미천한 스케이트보드 실력이나, ‘파우더 스노에서는 넘어져도 안 아프다’는 격려가 눈 위에서는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처음에는 낙엽 자세로 1시간 이상 걸려 내려왔고, 이튿날에는 눈길을 헤매다 다른 리조트 센터로 내려왔다. 셋째 날 고대하던 ‘S자’ 슬라이드를 터득했다. 그러고도 수차례 미끄러지고 구르기를 반복했지만, 걸음마를 뗀 아이처럼 성취감이 대단했다. 눈 덮인 침엽수림을 미끄러져 내려오는 쾌감이 엄청났다. 리프트에서 만난 75세 일본인 할아버지도 아이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번역기를 통한 짧고 건조한 대화였지만 울림이 꽤 컸다. “50년간 초급 코스만 타지만 충분하다.” “아침 운해를 헤치며 눈길을 내려올 때가 가장 행복하다.”

펜스가 아니라 자작나무 사이를 헤치며 스키를 탈 수 있다.

펜스가 아니라 자작나무 사이를 헤치며 스키를 탈 수 있다.

춤추는 총지배인

홋카이도 클럽메드 키로로 피크의 뷔페 레스토랑. 즉석에서 참치를 해체해 손님에게 낸다.

홋카이도 클럽메드 키로로 피크의 뷔페 레스토랑. 즉석에서 참치를 해체해 손님에게 낸다.

투숙객이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쿠킹 클래스. 이날은 직접 밀가루를 반죽해 우동을 해 먹었다.

투숙객이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쿠킹 클래스. 이날은 직접 밀가루를 반죽해 우동을 해 먹었다.

일본 스키 여행의 반은 잠자리다. 알고 계시나. 일본에는 우리네 같은 ‘야간 스키’ ‘밤샘 스키’ 문화가 없다. 대부분의 슬로프와 리프트가 오후 6시면 문이 닫힌다. 하루만 놀다 내려갈 게 아니라면, 안락하고 근사한 리조트를 잡는 게 여행의 질을 높이는 방법이다.

이번에는 클럽메드 리조트에 숙소를 잡았다. 클럽메드는 전 세계 75개(26개국) 리조트를 갖춘 글로벌 기업. 클럽메드가 운영하는 24개 스키 리조트 중 3곳(토마무‧키로로피크‧사호로)이 홋카이도에 몰려 있었다.

클럽메드 토마무의 객실. 창 너머로 순백의 설경이 보인다.

클럽메드 토마무의 객실. 창 너머로 순백의 설경이 보인다.

토마무에서 4박, 키로로피크에서 2박을 보내며 여러 의미로 놀랐다. 클럽메드는 요즘 호텔‧리조트 서비스의 대세로 떠오른 ‘올 인클루시브’ 시스템을 전 세계에 유행시킨 주인공이다. 객실뿐 아니라 왕복 항공권과 공항~리조트 교통편, 식사와 주류, 편의‧놀이시설 등을 하나로 묶어 서비스한다. 성수기인 이맘때는 하룻밤 머무는 데 100만원이 훌쩍 넘지만, 만족도가 높다. 클럽메드 관계자는 “하룻밤 묵고 가는 투숙객은 제로에 가깝다”면서 “기본 4박 이상 머문다”고 귀띔했다.

조식 후 요가 체험, 쿠킹 클래스, 야키니쿠 바비큐나 뷔페 요리로 배 채우기, 스키(리프트권과 스키 강습이 모두 포함돼 있다) 후 실내 파도풀에서 피로 풀기…. 이곳에서의 일과는 대개 이런 식으로 흘러갔다. 모두 추가 비용 없이 즐길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노천탕에 걸터앉아 펑펑 쏟아지는 눈을 온몸으로 받을 때 가장 행복감이 컸다.

클럽메드 토마무의 위스키 바인 '네스트바' 아늑한 분위기 덕에 사진 명당으로 통한다.

클럽메드 토마무의 위스키 바인 '네스트바' 아늑한 분위기 덕에 사진 명당으로 통한다.

토마무에서 만난 앙리 지스카르데스탱(67) 클럽메드 회장은 말했다. “고품격 휴양을 제공하는 우리의 방식이 맞았다는 걸 펜데믹을 겪으며 새삼 확인했다. 힘든 시기도 있었지만, 토마무나 몰디브 리조트처럼 매출이 뛴 곳도 많았다. 향후 2년 안에 전 세계 17개 리조트를 새로 오픈할 예정이다.”

전 세계의 수많은 호텔‧리조트를 다녀봤지만 이곳처럼 열정적인 리조트는 처음이었다. 이른바 ‘G.O(Gentle Organizer)’라 불리는 리조트 상주 직원들이 매일 밤 자정 너머까지 나이트 파티를 주도했다. 총지배인을 비롯해 체크인을 돕는 리셉션 직원, 스키 강사, 리조트 의상 디자이너, 바텐더 등 다양한 직원이 무대에 올라 서커스와 군무를 펼쳤다. 손님보다 더 열정적으로 노는 총지배인은 이곳에서 처음 봤다. 아무리 내성적인 사람도 분위기에 취하지 않기 어려웠다. 한국 걸그룹 ‘뉴진스’를 좋아한다는 태국 청년, ‘치맥’이 그립다는 캐나다 사람과 어울려 밤늦도록 파티를 즐겼다.

매일밤 자정 너머까지 이어지는 나이트 파티. 가운데 마이크를 들고 파티를 주도하는 이가 클럽메드 토마무의 총지배인이다.

매일밤 자정 너머까지 이어지는 나이트 파티. 가운데 마이크를 들고 파티를 주도하는 이가 클럽메드 토마무의 총지배인이다.

오타루의 하루

오타루 운하를 따라 걷는 많은 여행자들. 운하 주변으로 옛 창고 건물을 개조한 식당과 잡화점이 줄줄이 늘어서 있다.

오타루 운하를 따라 걷는 많은 여행자들. 운하 주변으로 옛 창고 건물을 개조한 식당과 잡화점이 줄줄이 늘어서 있다.

홋카이도 서부 클럽메드 키로로피크에 머무는 동안 하루 짬을 내 오타루(小樽) 시내에 들렀다. 오타루는 과거 일본을 대표하는 항구도시였다. 1920년대 운하를 건설하며 온갖 물자가 모이고, 사람이 모였단다. 1880년 홋카이도에서 처음으로 철도가 개통한 곳도 오타루였다.

중심가인 사카이마치(小樽堺町通り)에는 당시 사용하던 창고와 공장, 은행 등을 활용한 미술관‧선물가게‧카페가 줄줄이 늘어서 있다. 용도는 바뀌었지만, 과거 영광의 흔적이 여전하다. 개인적으로는 엇비슷한 분위기의 선물 가게보다는 ‘오타루 비어’라는 이름의 양조장이 재밌었다. 1924년 건축돼 긴 세월 창고로 쓰다가, 1995년 지금의 맥주 양조장으로 탈바꿈했단다. 창고 건물 특유의 눅눅하고 낡은 분위기도 그렇고 집채만 한 양조 설비, 세계 각국에 온 맥주병에 둘러싸여 생맥주를 들이켜는 묘미가 컸다.

옛 창고를 개조해 1995년 문을 연 오타루비어가. 실내 한복판에 큼지막한 양조 시설이 있다.

옛 창고를 개조해 1995년 문을 연 오타루비어가. 실내 한복판에 큼지막한 양조 시설이 있다.

오르골 가게로 이름난 '오르골당'. 19일 오후 방문했을 때는 손님 중 절반 이상이 한국인이었다.

오르골 가게로 이름난 '오르골당'. 19일 오후 방문했을 때는 손님 중 절반 이상이 한국인이었다.

오타루는 삿포로와 함께 홋카이도를 대표하는 도시이자, 관광지이다. 특히나 도시 전체가 눈으로 덮이는 이맘때는 오사카‧후쿠오카‧도쿄 못지않은 인기를 누린다. 한국인에게도 마찬가지다.

“일본관광청(JNTO)에 따르면 2023년 1월 방일 외래객 수는 잠정치로 약 156만 명에 달했다. 그중 한국인은 58만1071명으로 점유율이 가장 높았다.”

일본에 와서 이런 내용의 뉴스를 접했다. 산속에서는 크게 와 닿지 않았는데, 오타루 시내로 나오자 그 분위기를 체감할 수 있었다. 명물 오타루 운하를 내다보는 다리 위나, 이름난 오르골 선물 가게는 한국인이 대다수였고, 한국말이 월등히 더 크게 들렸다. 한국인이 돌아오면서 오타로 시내도 코로나 이전의 활기를 되찾았단다.

오타루 한편의 ‘CHAFF’라는 드립 커피 전문점에서는 이런 환대도 받았다. 커피 맛이 좋아 한 잔 두 잔 홀짝홀짝 들이켰는데, 카페 사장에게 원두를 선물 받았다. 그것도 모자라 커피값은 뒷자리 현지인 여성이 대신 내줬다. 그가 내민 스마트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나도 한국에 여행 갔을 때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오타루 중앙시장 인근의 'CHAFF'. 직접 커피를 볶고 내리는, 커피향 진한 로스터리 카페다.

오타루 중앙시장 인근의 'CHAFF'. 직접 커피를 볶고 내리는, 커피향 진한 로스터리 카페다.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Innovation La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