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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외친 尹 왜 기업 때렸나…용산은 "자유의 적" 지목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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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윤석열 대통령이 21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제8회 국무회의에서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 윤 대통령은 이날 건폭(건설 폭력) 근절 대책을 지시했다. 사진 대통령실

윤석열 대통령이 21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제8회 국무회의에서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 윤 대통령은 이날 건폭(건설 폭력) 근절 대책을 지시했다. 사진 대통령실

취임사에서 자유를 서른다섯 번 외치고, 대통령실 청사 대강당에 자유홀이란 이름을 붙인 윤석열 대통령이 민간 분야인 금융과 통신을 연일 비판하고 있다. 건설노조의 불법 폭력 행위를 조폭을 연상케 하는 ‘건폭(建暴)’이라고 지칭하며 노동자들의 자율적 결사체인 노조에 대해서도 엄정 대응을 강조한다.

윤 대통령의 발언에 시장은 예민하게 반응했다. 노조 불법 행위 근절 의지는 쌍수 들고 환영하지만, 국내 GDP의 10.3%(2020년)를 차지하는 금융과 통신에 직격탄을 날리자 관치(官治)란 반발도 나온다. 그동안 정부 개입을 선호해 온 야당이 외려 “자유시장 경제라는 우회전 깜빡이를 켜고 관치금융으로 유턴하는 것 같다“(21일, 국회 정무위 더불어민주당 김한규 의원)고 지적하는 진풍경도 연출됐다.

자유, 즉 시장경제와 관치는 병립할 수 없다. 자유를 신봉하는 윤 대통령의 철학과 최근 정책 행보가 언뜻 이율배반적으로 보이는 이유다. 그러나 대통령실은 이 모두가 자유라는 국정 철학의 연장선에 있다고 설명한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22일 “공정한 경쟁 없이 시장 질서를 지배하는 기업의 독과점과 고용시장을 교란하는 거대 노조의 폭력은 자유시장경제의 적이라는 것이 윤 대통령의 인식”이라며 “윤 대통령이 직접 강한 톤으로 나선 것도 이 때문”이라고 말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5월 10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잔디마당에서 열린 제20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취임사를 하고 있다. 윤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자유를 35번 언급했다. 김성룡 기자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5월 10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잔디마당에서 열린 제20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취임사를 하고 있다. 윤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자유를 35번 언급했다. 김성룡 기자

윤 대통령은 여전히 자유와 시장을 강조하고 있다. 지난 21일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 등으로부터 ‘건설 현장 폭력 실태’를 보고받는 자리에서도 윤 대통령은 “자유시장경제라는 근본 질서를 지키지 못하면 경제발전은 물론 기업 가치도 제대로 평가받을 수 없다”고 역설했다.

대통령실 핵심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취임사로부터 단 한 걸음도 달라지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독과점은 독버섯 같은 존재로, 이를 혁파해 제대로 된 경쟁 시스템을 갖춰야만 국제적인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 자유시장경제의 본산이라 할 수 있는 미국도 독과점에는 유독 엄격하다. 130여년의 역사를 지닌 반독점법이 대표적 사례다. 미국 정부는 1998년 마이크로소프트(MS)의 우월적 시장 지위를 우려해 기업 분할을 요구하기도 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5일 통신비 부담을 줄이기 위한 대책을 논의했다.   정부는 이동통신사와 5G 중간요금제의 기본 데이터 제공 확대, 시니어 요금제 출시 등 이용자의 요금 선택권을 확대하기 위한 협의를 한다고 밝혔다. 뉴스1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5일 통신비 부담을 줄이기 위한 대책을 논의했다. 정부는 이동통신사와 5G 중간요금제의 기본 데이터 제공 확대, 시니어 요금제 출시 등 이용자의 요금 선택권을 확대하기 위한 협의를 한다고 밝혔다. 뉴스1

대통령실은 윤 대통령의 일관된 입장의 근거로 지난해 대한민국을 멈추다시피 한 ‘카카오톡 먹통 사태’를 지목했다. 윤 대통령은 당시 도어스테핑에서 “저는 기업의 자율과 창의를 존중하는 자유시장경제 사고를 가지고 있지만, 그건 시장 자체가 공정한 경쟁 시스템을 갖췄다는 전제로 한 것”이라며 “독점이나 심한 과점 상태에서 시장이 왜곡됐다면 국가가 필요한 대응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독과점이란 점에선 금융ㆍ통신 산업과 카카오가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것이다. 한국국제경제학회장인 고려대 강성진(경제학) 교수는 “윤 대통령의 언어가 거칠다 보니 관치란 비판이 나올 수는 있다”면서도 “은행과 통신 산업의 문제는 역대 정부에서 진정한 자유경쟁 시스템을 만들지 못해 발생한 측면이 크다”고 진단했다.

독과점을 경계하는 윤 대통령의 시각은 노동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배경과도 일맥상통한다. 노동 시장도 양대 노조(민주노총ㆍ한국노총)가 장악한 독과점 시장이란 것이다. 윤 대통령은 21일 국무회의의에서 “강성 기득권 노조의 불법행위로 근로자들이 일자리를 잃고 있다”고, 20일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의 보고를 받을 때는 “강성 노조의 폐해 종식 없이는 대한민국 청년의 미래가 없다”고 말하며 단호한 조치를 주문했는데, 대통령실 관계자는 “양대 노조가 장악한 왜곡된 시장에선 청년과 비정규직 등 조직화하지 않은 약자는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21일 경기남부경찰청 앞에서 열린 '경기중서부건설지부 압수수색 규탄 기자회견'에서 민주노총 전국건설노동조합 수도권남부지역본부 등 참석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21일 경기남부경찰청 앞에서 열린 '경기중서부건설지부 압수수색 규탄 기자회견'에서 민주노총 전국건설노동조합 수도권남부지역본부 등 참석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인 김형동 국민의힘 의원은 “자유로운 경쟁 시장에서만이 청년과 비정규직 등 노동시장의 약자도 기회를 얻을 수 있다”며 “윤 대통령이 문재인 정부에서 외면한 5인 미만 사업장 내 노동자에 대한 보호 강화를 지시한 데서 보듯, 노동 탄압이란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고 말했다.

대통령실은 최근의 움직임이 은행의 돈 잔치 논란이나 과도한 통신요금 등에 대한 즉자적 대응이 아니란 점도 분명히 했다. 대통령실의 의사 결정은 통상 매일 아침 김대기 비서실장 주재로 수석비서관만 참석하는 ‘소인수 회의’를 거쳐 각 수석실과 부처 간 정책 조율→국정기획과 정무수석실의 리스크 분석→윤 대통령 주재 수석비서관 회의→추가 부처 조율→정책 발표의 과정을 거친다.

건폭 근절 및 노조 회계 투명화, 금융ㆍ통신업계의 실질적 경쟁시스템 강화 대책 모두 몇 달씩 위 사이클을 거친 끝에 도출된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지난해부터 예대 마진을 포함한 금융계 문제를 모니터링해왔다”며 “자체 개선 의지가 부족하다고 판단해 윤 대통령이 근원적 대책을 주문하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통신 시장에 경고장을 날린 것도 지난해 11월 정부가 3대 통신사에 5세대(5G) 통신용 28GHz 대역 주파수 할당을 취소할 때부터 문제 의식을 갖고 논의됐던 사안이다. 건폭 대책과 노조 회계 투명화의 경우 지난해 7월 대우조선해양 하청노조의 파업 이후부터 준비해왔던 시나리오 중 일부라고 한다.

하지만 이런 의도와 달리 시장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은행과 통신주는 요동을 쳤고, 외국인 투자 자금이 빠져나갔다는 소식도 들린다. 시장에선 자유시장경제에 대한 윤 대통령의 진정성을 조금 더 지켜봐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역대 정부와 마찬가지로 윤석열 정부에서도 관피아 출신 올드보이가 금융계 수장으로 가면서 또다른 관치 논란을 부르기도 한다. 농협금융지주 회장으로 임명된 이석준 전 국무조정실장은 윤 대통령의 초기 대선 캠프 핵심 멤버였다. 강성진 학회장은 “윤석열 정부가 자유시장을 내세우며 개혁을 하겠다는 모든 분야에서 기득권과의 충돌은 불가피한 상황”이라며 “국민적 지지를 얻을 수 있는 구체적 액션 플랜을 통해 활로를 뚫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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