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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행동주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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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안효성 기자 중앙일보 기자
안효성 증권부 기자

안효성 증권부 기자

주주 행동주의의 바람이 거세다. 에스엠에 이어 BYC, 태광산업, KT&G 등의 기업들이 지배구조를 개편하고 배당 등 주주환원을 늘리라는 행동주의 펀드의 공세에 직면했다. 후진적인 기업 지배구조와 인색한 주주환원에 질린 투자자들이 많았던 탓인지 행동주의 펀드의  주장에도 힘이 실린다.

은행 등 일부 기업들은 정부의 공세에도 직면했다. 은행에는 대출 금리 인하를 요구하고 성과급 체계를 점검하겠다고 한다. 이자 장사로 번 수익을 자영업자, 소상공인 등 국민과 나눠야 한다는 취지다. 통신사도 거센 요금 인하 압박을 받고 있다. 지배구조 개편에도 적극적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직접 스튜어드십 코드를 언급하며 투명한 지배구조를 강조하고 있다. 은행이나 KT같이 소유 분산 기업, 이른바 주인 없는 회사들이 대상이다.

김주현 금융위원장(왼쪽)과 이복현 금감원장이 21일 국회 정무위원회에 참석해 의원 질의를 듣고 있다. [연합뉴스]

김주현 금융위원장(왼쪽)과 이복현 금감원장이 21일 국회 정무위원회에 참석해 의원 질의를 듣고 있다. [연합뉴스]

정부는 은행 등 이들 기업의 지분도 갖고 있다고 여기는 듯하다. 정부에서 진입 규제 장벽을 쳐줘 편하게 이익을 보게 해줬으니 주요 주주로 봐줄 수는 있지 않겠느냐는 셈법이다. 금융기관에는 수시로 낙하산 인사를 내려보내고, 예금 금리에 수시로 개입해 왔다. 은행과 통신사의 ‘주요 주주’인 것처럼 정부가 나서 회사의 개선을 요구하고 있으니 이쯤 되면 ‘정부 행동주의’라 불릴 만하다.

정부 행동주의는 주주 행동주의보다 유리한 면이 많다. 주주 행동주의가 소액 주주들의 표를 모으기 위해 동분서주할 때 규제 당국 수장의 입을 빌려 슬며시 기업의 팔만 비틀면 된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은행 영업이 약탈적”이라고 규정하고, 공정위원회는 휴대폰 요금 체계를 분석한다고 발표한다. 기업 입장에서는 정부 행동주의의 요구를 외면하기 쉽지 않다.

정부 행동주의로 당장은 국민의 편익이 올라갈 수도 있다. 통신 요금이 내려가고 대출 이자는 덜 내게 될 것이다. 은행들의 대출금리 인하도 시작됐다. 정부 입장에서는 재정을 덜 쓰면서 치솟는 물가와 꺾이는 내수에 대응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다. 고금리·고물가에 지친 서민들의 지지는 덤이다. 마침 정부의 지지율도 다시 40%를 넘어섰다고 한다.

다만 행동주의가 언제나 좋은 결과를 갖고 오는 것은 아니다. 주가가 오른 후 언제든 손 털고 나갈 수 있는 게 행동주의 펀드다. 당장의 이익을 위해 기업의 성장 동력을 갉아먹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정부 행동주의도 마찬가지다. 고물가·고금리의 고통에서 잠시 벗어나기 위해 한국 경제의 성장 동력을 갉아먹을 수 있다. 기업이 적당히 돈을 벌어야 정(釘)을 맞지 않는 국가, 정부가 성과급 수준마저 정해주는 기업에서 혁신이 가능할 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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