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오현(45·현대캐피탈)의 별명은 ‘수퍼 땅콩’이었다. 처음 배구와 인연을 맺은 초등학교 3학년 때, 그의 키는 1m45㎝에 불과했다. 팀에서 키가 가장 작은 대신 순발력과 운동신경은 가장 뛰어났다. 처음엔 배구팀에서 주는 빵과 우유가 좋았는데, 갈수록 배구공을 때리는 게 더 신났다.
문제는 언제나 ‘키’였다. 배구는 높이 싸움인데, 그는 늘 또래 선수들보다 한 뼘 이상 작았다. 중학교 땐 “레슬링이나 유도 같은 운동을 하는 게 어떠냐”는 권유도 받았다. 그래도 배구가 좋아 이를 악물고 버텼다. 키 크는 데 도움이 된다는 음식도 닥치는 대로 먹었다.
그래도 키가 자라진 않았다. 배구로 대학까지 진학했지만, 끝내 1m75㎝에서 성장이 멈췄다. 어쩔 수 없이 ‘배구를 그만둬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뜻밖의 행운이 찾아왔다. 수비 전문 포지션인 리베로 제도가 도입됐다. 레프트 공격수였던 그는 ‘생존’을 위해 포지션을 바꿨다. 처음엔 공격수 뒤에서 공을 받기만 하는 게 재미 없었지만, 날이 갈수록 ‘수비의 희열’을 느끼게 됐다.
여오현의 배구인생은 그렇게 ‘리베로’라는 포지션을 만나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 그리고 그는 45세가 된 올해 V리그 역사에 가장 의미 있는 이정표를 세웠다.
지난 21일 천안 유관순체육관에서 열린 우리카드와의 홈 경기에서 정규리그 통산 600번째 경기에 출전했다. 프로배구 원년인 2005년부터 한 해도 빠지지 않고 매 시즌 20경기 이상 코트를 지킨 결과다. 포스트시즌(75경기)과 컵대회(55경기)까지 더하면 프로 출장 경기 수가 730게임에 이른다.
여오현의 현재 보직은 플레잉 코치다. V리그 출범 전인 2000년 12월 삼성화재 배구단에 입단한 그는 2015년부터 이미 코치와 선수를 병행해왔다. 그러면서도 올 시즌 리시브 1위를 달리면서 리그 정상급 기량을 유지하고 있다. 여오현에게 ‘45세 프로젝트’를 제안했던 최태웅 현대캐피탈 감독조차 “같은 세대에 운동한 선수인데, 어떻게 저런 퍼포먼스를 보여주는지 대견하다”고 감탄할 정도다. 최 감독은 이날 여오현에게 축하의 꽃다발을 건네면서 “살짝 눈물이 나서 참느라 힘들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여오현의 활약 속에 현대캐피탈도 날개를 달았다. 이날 우리카드를 세트스코어 3-0으로 제압하면서 승점 61(20승 10패)을 쌓아 1위로 올라섰다. 시즌 내내 선두를 달리던 대한항공(20승 9패·승점 59)을 마침내 2위로 밀어냈다. 오레올 까메호-전광인-허수봉 삼각편대의 위력이 절정에 달했고, 든든한 베테랑 여오현이 적재적소에서 수비의 안정감을 끌어올리고 있다. 지난 시즌 최하위 팀의 눈부신 반란이다.
여오현은 이미 챔피언결정전 우승을 9차례나 경험했다. 올 시즌 현대캐피탈이 챔프전에서 우승하면 10번을 꽉 채운다. 그는 “부모님이 건강하게 낳아주셨고, 선수 생활 내내 수술을 한 번도 받지 않는 행운에다 노력을 더해 여기까지 왔다. 팀에 내가 필요하다면 힘 닿는 데까지 코트에서 뛰고 싶다”며 “무엇보다 챔프전 우승 10번을 채우고 싶은 게 내 욕심이다. 리시브 하나라도 더 잘 받아서 후배들이 우승하는 데 힘을 보태고 싶다”고 말했다.
▶여오현은
● 생년월일=1978년 9월 2일 (45세)
● 소속팀=현대캐피탈
● 포지션=플레잉 코치(리베로)
● 신체조건=키 1m75㎝, 몸무게 71㎏
● 출신교=대전 유성초-대전중앙중-대전중앙고-홍익대
● 경력=2000년 삼성화재 입단-2013년 현대캐피탈 이적-2015년 현대캐피탈 플레잉코치
● 주요 수상경력=2005~2006, 2006~2007, 2009~2010 V리그 수비상
2014~2015, 2015~2016 V리그 베스트 7
2010 광저우아시안게임 남자배구 동메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