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꽃이 된 픽셀, 구름이 된 붓자국…‘자유’를 외치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8면

두 작가의 출발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시차는 있지만, 무엇보다 같은 대학(서울대)에서 회화를 전공했다.

국제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여는 홍승혜 작가. 홍 작가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기반으로 조각, 사운드 작업을 넘나든다. [사진 각 갤러리]

국제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여는 홍승혜 작가. 홍 작가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기반으로 조각, 사운드 작업을 넘나든다. [사진 각 갤러리]

한 사람은 붓을 내려놓고, 1997년부터 컴퓨터 픽셀을 기반으로 작품을 만들었다. 컴퓨터 안에서 그가 만들던 평면 도형은 현실 공간으로 튀어나와 가구가 되고, 음악과 조명을 받으며 춤추는 설치 작품이 되었다. 순수 미술과 디자인 사이를 넘나들며 작업하는 홍승혜(63) 얘기다.

다른 한 사람은 오랫동안 산과 바위 풍경을 캔버스에 담았다. 시간이 흐르며 그의 시선은 산 너머 하늘로, 구름으로 옮겨갔다. 그의 캔버스엔 이젠 산인지 구름인지,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것들이 수수께끼처럼 담겼다. 화가 정주영(54)이다.

서울 삼청동 국제갤러리와 갤러리현대에서 두 작가의 전시가 나란히 열리고 있다. 국내 두 메이저 갤러리가 일찍이 발굴하고 지원해온 중견 작가다. 그런데 달라도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선과 색채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했다는 점에서는 이들이 닮았지만, 각자 자기 언어로 펼쳐 놓은 작품은 관람객을 전혀 다른 세계로 이끈다.

국제갤러리 1·3관에서 ‘복선을 넘어서 Ⅱ’라는 제목으로 전시 중인 홍승혜는 1986년 파리 국립미술학교를 졸업했다. 시각적 원리와 규칙으로 만들어진 픽셀 세계에 매료된 뒤, 붓을 내려놓고 컴퓨터 화면의 기본 단위인 사각 픽셀을 조합·분해하며 다양한 도형 이미지들을 만들어왔다. 왜 픽셀이냐는 물음에 그는 “백지에서 뭔가 싹이 돋아나는 것을 보는 게 재미있었다”고 답했다.

이번 전시는 그런 과거 작업에서 한발 더 나아갔다. 끊임없이 새로운 프로그램을 섭렵하며 사각형 틀에서 벗어나 별과 꽃, 타원을 만들어 가는 과정 자체가 작품이 되었다. 일부는 아예 가구와 조각이 되어 실재 공간으로 튀어나왔다. 3개 전시장에서 열리는 전시는 평면 회화에서 조각, 설치로 확장된 그의 작품 세계를 보여준다.

그는 “이번 전시를 통해 해방과 자유로움에 관해 얘기하고 싶었다”며 “25년 동안 머물러 있던 격자 틀에서 벗어나니 더 자유롭게 많은 얘기를 들려주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제가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에 새로운 도전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다”고 했다. 계속 새 프로그램을 배우며 작업이 달라졌다는 얘기다. “두려움 없는 아마추어 정신이 나를 움직이게 한다. 항상 새로운 것을 익히며 완벽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 자체가 제 작업이 됐다”고 말했다.

컴퓨터 앞에서 작업하는 것은 여전하지만, 작품에 등장하는 이미지는 도형에서 인간으로, 인간에서 별과 꽃으로 진화했다. 2016년부턴 컴퓨터로 사운드(음악)도 직접 만든다. 유년기 추억을 회상하며 만든 작품 곳곳엔 동심을 자극하는 놀이 감성이 배어 있다.

색에 대한 관심도 남다르다. 그는 이번에 두 전시장 벽을 프랑스 화가 앙리 마티스(1869~1954)에 바치는 작품으로 꾸몄다. “마티스는 색채의 기쁨을 아는 작가였다”며 “이번 전시에서 캔버스가 없어도 공간에 놓인 사물과 사물의 거리, 공간과 사물의 조화 자체가 작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전시는 다음 달 19일까지.

갤러리현대에서 전시하는 정주영 작가. 정 작가는 ‘기상학’을 주제로 관념과 실재, 구상과 추상 사이를 넘나든다. [사진 각 갤러리]

갤러리현대에서 전시하는 정주영 작가. 정 작가는 ‘기상학’을 주제로 관념과 실재, 구상과 추상 사이를 넘나든다. [사진 각 갤러리]

갤러리현대에서 ‘그림의 기후’ 전을 열고 있는 정주영은 1997년 독일 쿤스트 아카데미 뒤셀도르프를 졸업했고,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교수다. 이번 전시에 그는 ‘알프스’ 연작의 최신작과 ‘기상학’을 주제로 하늘과 구름 등 대기 풍경으로 시선을 넓힌 ‘M’ 연작까지 총 60여 점을 내놨다. 연작의 제목인 ‘M’은 ‘기상학’의 영어 단어 ‘Meteorology’의 첫 글자에서 따왔다.

그는 넓고 납작한 붓을 사용해 여러 색을 쌓고 또 쌓는 방식으로, 시시각각 변하고 흘러가고 사라지는 대기 풍경을  표현했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큰 탄성을 자아내는 작품은 선묘법으로 거대한 먹구름을 그린 대형 회화 ‘M40’과 ‘M41’이다. 색을 몇 겹으로 입힌 유화지만, 마치 수채화처럼 투명한 색채 표현이 돋보인다. 그가 “그리기보다는 지우고 또 지운 붓질과 색의 흔적으로 완성한 작업”이다.

자신의 작품을 가리켜 “추상과 구상, 동양화와 서양화 사이에 있다”는 그는 “공기와 물, 땅에 관한 기후 현상을 관찰하고, 이를 숱한 색의 겹침으로 표현하면서 무한한 자유로움을 느낀다”고 말했다. 전시는 다음 달 26일까지.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