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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간 붓글씨로 쓴 공직자 임명장이 6만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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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국내 세 번째 공식 필경사로 근무해 온 김이중 사무관이 임명장 샘플을 들고 있다. [중앙포토]

국내 세 번째 공식 필경사로 근무해 온 김이중 사무관이 임명장 샘플을 들고 있다. [중앙포토]

공직에서 40여년 가까이 근무하다 퇴직한 문모(69)씨에게는 가보로 여기는 종이가 있다. 5급 승진 당시 받은 임명장과 대통령이 수여한 훈장이다. 그는 “국새(國璽)와 함께 위엄 있는 붓글씨로 새겨진 임명장·표창장을 보면 지금도 가슴이 뛴다”고 말했다.

이처럼 많은 공무원이 ‘가문의 영광’으로 여기는 임명장을 작성하던 김이중(48) 인사혁신처 사무관이 자리에서 물러났다. 인사혁신처는 22일 “김이중 필경사(筆耕士)가 최근 개인 사유로 퇴직했다”고 밝혔다. 필경사는 5급 공무원부터 국무총리까지 국가직 공무원 임명장을 붓글씨로 쓰는 업무를 담당하는 공무원이다. 필경이란 붓으로 밭을 간다는 의미다.

김 사무관이 공직에 발을 들인 건 2003년이다. 1993년 계명대 미대 서예과에 입학해 붓글씨를 연마하고 서예학원 등에서 강사로 일했던 경력을 인정받아 6급에 특채됐다. 2020년 예능프로그램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하기도 했다.

임용 당시에는 주로 훈장 등 대통령·국무총리 명의 표창장을 작성했다. 2008년부터 임명장 쓰는 일로 보직이 바뀌었다. 5급 이상 공직자 임명장은 연간 4000~7000장 정도다. 15년 동안 필경사로 일했으니 최소 6만장 이상 공문서를 작성한 셈이다. 가로 26㎝·세로 38㎝ 크기의 임명장에는 소속 부처와 실·국·과, 직책명, 이름 등이 들어간다.

그의 사무실엔 벼루·먹·붓·종이 등 문방사우(文房四友)가 놓여있었다. 날마다 벼루에 먹을 갈아 대통령 이름이 새겨진 임명장을 붓으로 채우는 업무를 맡았다. 거의 모든 문서를 프린터로 인쇄하는 요즘 시대에 수기로 작성하는 공문서는 대부분 그의 손을 거친 셈이다.

간부 공무원으로 분류되는 5급 이상 공직자 임명장에는 국새와 대통령 직인을 찍는다.

정부 수립 이후 김 사무관은 세 번째 공식 필경사다. 1962년 필경사 보직 신설 이래 제1대 필경사가 1995년까지, 제2대 필경사가 2008년까지 공직에서 근무했다. 김 사무관은 제4대 필경사인 김동훈(45) 인사혁신처 주무관과 근무했다.

인사혁신처는 김 사무관이 퇴직하자 지난 17일 후임자 채용 공고를 냈다. 새로 채용하는 제5대 필경사는 대통령 명의 임명장을 작성하고, 대통령 직인·국새 날인, 임명장 작성 기록 대장 관리시스템 운영·관리 등을 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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