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전을 직감한 장군의 얼굴 뒤로 독백이 흐른다. “조정은 출전하는 병사들에게 막걸리 한 사발을 돌렸다. 면포로 한기를 막고 흰 쌀로 주린 배를 채워 줄 생각을 못 했다.”
장군의 목소리 뒤로 불을 피워 추위를 피하는 병사들의 초라한 행색이 차례로 나타난다. 유튜브 조회 수 520만회를 기록하며 ‘역덕’(역사 덕후·역사물 마니아)들의 열렬한 사랑을 받은 ‘화력조선’ 시리즈 중 ‘사르후 전투’의 한 장면이다.
대박난 사극 영화, 박물관이 만들었다
‘화력조선’은 국립진주박물관이 만들었다. 특히 많은 사랑을 받은 시즌3은 1619년 조선군이 명나라에 파병돼 후금과 싸운 사르후 전투, 1637년 광교산 전투 등을 다룬 10~20분 분량의 다큐멘터리와 단편 영화 등 총 다섯 편으로 구성됐다. 임진왜란 전문 박물관이기도 한 국립진주박물관의 특성을 살려 조선의 뛰어난 화약 무기 기술을 보여주겠다는 게 기획 의도다. 고고학 전공자이면서 ‘밀덕’(밀리터리 덕후, 전쟁·군사물 마니아)인 김명훈 학예연구사와 밀리터리 영상 제작사 ‘우라웍스’의 이영상 대표가 합작했다. “대하 사극을 보면서 속이 터져 직접 영화를 만들었다”는 이들을 지난 20일 만났다.
깃발·약통 하나도 사료 보고 고증
김 연구사가 꼽은 ‘화력조선’의 인기 비결은 “박물관스럽지 않은 연출”이다. 군사 관련 영상을 전문적으로 만들어온 민간업체 우라웍스가 연출은 물론, 소품 제작까지 맡아 영화 같은 비주얼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김 연구사와 논의하면서 장면 하나하나에 세심한 고증을 담았다. 이 대표는 “극 중 조선군이 휘날리는 흰 바탕의 백고초기(군영에서 길을 가르거나 합치는 신호로 사용했던 깃발)는 영조 때 만들어진 병서 ‘속병장도설’에 기록된 고초기 그림을 본 따 만들었다”고 했다.
조선군이 총을 쏠 때 나는 소리도 고증에 기반해 사실적으로 만들었다. 사르후 전투 영상에서 조선군이 조총을 쏠 때 ‘픽’하는 맥없는 소리가 난다. 김 연구사는 “초기의 활강총은 화약의 힘이 약하고 총알이 총신을 밀폐하지 못해 힘없는 소리가 났다”며 “강한 파열음의 총기 소리가 나게 된 것은 몇백년 후의 일”이라고 설명했다.
이 대표는 가장 기억에 남는 작업으로 “1600년대 조총을 재연하기 위해 일본에서 조총용 화승(불을 붙이는 용도의 노끈)을 공수해온 일”을 꼽았다. 거마작(기병대의 진격을 막기 위해 세우는 울타리)과 귀약통(화약을 보관하는 용기)도 그가 목재를 사와 사료를 뒤져가며 직접 만들었다. 편당 평균 1600만원을 투입한 저예산 단편영화가 이토록 인기를 끌 수 있었던 배경이다.
스스로를 ‘밀덕’, ‘역덕’이라 자처하는 이들은 “제대로 된 사극을 만들고 싶었다”고 입을 모았다. 김 연구사는 “대하 사극에 나오는 조선군은 죄다 삼지창을 들고 있지만 삼지창은 숙련된 소수의 살수(창·칼을 다루는 병사)만 쓸 수 있는 무기였고 사르후 전투에 파견된 조선군의 절반 이상이 조총병으로 구성돼 다양한 화력 무기가 쓰였다”며 “무기를 다루는 방식과 전투의 진행 양상을 최대한 사료에 충실하게 재연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17세기 전투를 영상화하면서 활과 창으로만 싸우는 장면을 넣는 것은 잘못된 방식”이라며 “사료에 근거해 화약 무기를 많이 등장시켰고, 조총이 작동하는 방식 등을 디테일하게 표현했다”고 했다.
‘역덕’과 ‘밀덕'’들이 손꼽아 기다리는 ‘화력조선’ 시즌 4는 오는 8월 공개된다. 단편영화를 포함한 영상을 먼저 공개한 뒤 4개월 후인 12월에 국립진주박물관에서 특별전을 연다.